섬진강 따라 이어지는 19번 국도의 악양 구간은 둑을 쌓아 만든 길입니다. 둑을 쌓기 전에는 섬진강물이 악양 마을 안쪽으로 깊게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악양 들판을 물이 드는 들판이라고 해서 ‘무딤이 들판’이라고 부릅니다. 악양 들판의 또 다른 이름인 ‘평사리 들판’은 행정구역으로 평사리에 있어서 그렇게 부릅니다. 평사리 들판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소설 ‘토지’의 영향입니다. ‘악양 들판’, ‘무딤이 들판’, ‘평사리 들판’은 같은 곳에 대한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은 ‘무딤이 들판’의 입장입니다. 
오랜 세월 섬진강 물이 들어 생긴 자연 생태습지가 들판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정호입니다. 동정호에는 오래 묵은 왕버들 나무가 떼 지어 있고 물풀들이 무성해 풍경이 깊습니다. 백로나 오리들이 다니고, 개구리나 두꺼비 같은 습지 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계절마다 쉼 없는 변화로 다양한 풍광을 선사합니다. 이른 아침에 1km 남짓한 동정호 둘레를 걸으면서 햇살 가득한 물빛을 볼 수 있다면 그 날은 그저 고마운 날입니다. 

 

악양의 동쪽, 칠선봉 너머에서 오른 아침 햇살이 무딤이 들판을 달려 서쪽 동정호에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어둑했던 숲이 아침햇살을 받아 제빛을 내려 합니다. 

 

 

동정호의 왕버들 숲에 악양루가 있습니다. 악양루는 원래 악양의 동편, 개치마을에 있었는데 오래되어 해체하고 동정호에 새로 지었습니다. 새로 지어 옛 정취는 없어도 세월을 두고 정취를 고이 쌓아가면 됩니다. 


 

 

악양루에 올라서면 동정호와 무딤이 들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 맛에 누각에 오릅니다. 섬진강 바람이 누각을 지나치면서 한여름 더위를 날리고, 칠선봉 너머에서 내려오는 햇살은 아침 습기를 날립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살결에 닿은 바람과 아침볕을 느껴봅니다. 

 

 

왼편이 칠선봉이고 오른편이 구재봉입니다. 칠선봉을 넘어 구름까지 오른 햇살이 아침을 밝힙니다. 동정호는 그 모두를 품었습니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악양루에 올라’라는 시가 있습니다. 중국 동정호의 절경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이지만 중국 동정호의 아름다움은 알 길이 없고 내 앞에 있는 동정호의 아름다움은 아침을 벅차게 합니다. 

 

 

돌아 나선 길에 오리가족을 만났습니다. 조심스레 걸어가도 예민한 그들은 사람을 뒤로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의 아침 고요를 깨트렸습니다. 미안한 일입니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깨트린 것의 다름 아닙니다. 요즘 시절의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아침 나들이는 평화로웠습니다. 산골 마을에 사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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