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영삼 전 대통령(한국티볼협회 총재)이 지난 2008년 6월 7일 오전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제1회 한국티볼협회 총재배 전국초등학생 티볼대회 개막식에서 시타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시안= 기영노 편집위원]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화 되거나, 침체됐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었고, 그래서 그 나라의 스포츠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 통합해 문화체육부 발족

1993년부터 1998년까지 5년 동안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 출신의 대통령 시절보다 상대적으로 엘리트 스포츠 정책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 대통령 재임 동안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이 열렸지만 김 대통령이 태릉선수촌을 찾아서 국가대표 선수들을 격려한 것은 몇 차례 되지 않았다. 의례적인 행사 때 만 선수들을 만났을 뿐이었다.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최초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불린 김영삼 정부는 군사정권과의 차별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더욱 강조했고 특히 군부 통치의 유산을 청산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체육 정책도 군사정권 기간 엘리트 스포츠에 중점을 두었던 것에서 벗어나 생활체육을 중점적으로 발전이 이뤄졌고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체육의 균형 육성을 목표로 했다. 그러한 기조는 1993년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를 통합해 문화체육부를 발족시켰으며 그해 7월 마련된 국민체육진흥 5개년계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체육진흥을 국민복지 차원의 주요 정책과제로 인식, 생활체육 진흥을 중점 과제로 삼을 것이라 밝혔었다.

김영삼 정부의 체육 정책 주요 추진 전략은 우선 생활체육과 엘리트 스포츠를 균형적으로 육성시키고, 학교체육에 대한 정책적 노력을 강화했다.

또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체육활동에 참가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마련해 주고, 체육과 문화의 접목을 시도했었고, 시대적 여건 변화에 따른 정책 및 제도를 재조정했었다.

일본보다 준비가 10년이나 늦었지만, 적극적으로 스포츠 외교를 펼친 끝에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한, 일 공동개최로 이끌어냈고, 1997년 프로농구를 출범 시켜 농구가 야구와 축구와 함께 3대 프로 스포츠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 개인적으로는, 재임 동안 등산과 조깅을 즐겼다.

통영 중학교 재학시절 축구선수였던 그는 외국에서 승리한 대표 팀을 격려하다 ‘코너킥’을 ‘페널티킥’으로 잘못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축구선수 출신이라면서 축구에서 가장 기초적인 경기 룰인 코너킥과 페널티 킥을 구분하지 못하는 망신을 당한 것이다.

재임 동안 골프 치지 않겠다고 선언

김 전 대통령은 골프를 잘 치지 못했다. 그래서 (대통령)재임 기간 골프중단을 선언했었다.

드라이버 샷을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망신살을 뻗쳤고, 마침 내 “재임 중 골프를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대통령의 골프 중단 선언은 우리나라 골프계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게 했었다.

공직자들 사이에 골프 금지 분위기가 일어나 국내의 전체적인 골프 산업이 위축되기도 했었다.

대통령들의 별장인 청남대에 5개 그린에 9홀 코스의 그림 같은 골프장이 있지만, 그는 골프를 전혀 즐기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조깅을 좋아해서 대청호 옆으로 난 호적한 코스를 달리곤 했다. 지금은 일반인에게도 개방된 청남대 대청호 코스에는 김 대통령이 조깅하는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 대통령은 야인(野人) 시절 사조직인 민주산악회를 만들어 주말 등산을 즐기곤 했는데, 재임 동안에는 청와대 뒷산을 자주 올랐었다.

임기 말에는 배드민턴에 푹 빠져 있었는데 배드민턴을 치면서 “이 좋은 걸 내가 우 째 이렇게 늦게 알았노”라며 아쉬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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