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프로야구 KIA 타이거즈 대 삼성 라이온스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KIA 팬들이 관중석을 가득 채우고 응원을 펼치고 있다.(사진=뉴시스)

[뉴시안= 기영노 편집위원]1982년 “어린이에게는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 건강한 여가선용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했었던 프로야구(KBO)가 어느덧 40주기를 맞았다.

그동안 프로야구팀 수도 6팀에서 10팀으로 늘었고, 1998년 이후 외국 선수들도 합류해 프로야구의 ‘양과 질’이 매우 높아졌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땄지만, 방심했는지 2020 도쿄올림픽에서는 미국, 일본은 물론 도미니카에도 패해 4위에 머무르기도 했다.

프로야구 40년 주년을 맞아 재미있고 의미 있는 40개의 스토리로 매주 수요일 찾아뵙고 있다.

 

프로야구 1982년 창설 이후 최대위기

프로야구가 1982년 창설 이후 최대위기를 맞고 있다.

도쿄올림픽 직전, 원정 숙소에서 술자리를 가진 과정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위반해 NC 다이노스의 박석민, 박민우, 이명기, 권희동 4명의 선수가 후반기(72경기) 출전정지 징계를 받아 출전하지 못하고 있고, 키움 히어로즈 한현희와 안우진도 역시 술자리 파문으로 36경기 출장 정지를 당했고, 한화 이글스 주현상과 윤대경은 해당 모임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회피하려고 노력한 점을 참작해 10경기 출장 정지의 징계를 받고 있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주축이 된 도쿄올림픽 대표팀은 일본은 물론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주축이 된 미국과 도미니카에게도 패해 4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런 과정에서 키움 히어로즈의 외야수 송우현은 음주운전으로 퇴출되었고, 기아 타이거즈 에이스 에런 브룩스가 대마초 성분이 포함된 전자담배를 영입하려다가 적발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도쿄올림픽 이후 후반기 프로야구 뚜껑을 열어보니 수도권 무관중 경기 외에 일부 지방구장(당시 방역 수칙 3단계)은 수용인원의 30퍼센트를 허용 했지만 그나마 허용인원의 20퍼센트도 채우지 못했었다.

프로야구 팬들이 본격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역대 최고 인기 프로스포츠들의 몰락

우리나라 최고 인기 프로스포츠는 1960~70년대 프로레슬링, 1960~90년대 프로복싱, 1980~90년대 민속씨름에 이어서 프로야구가 그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프로레슬링은 흑백 TV 시절인 1960년대 최고 인기 스포츠 였었다. 

두발 당성을 주 무기로한 장영철, 태권도를 특기로 한 천규덕 등이 최고인기 선수였고, 일본에서 활약하던 박치기의 김일 선수가 가세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었다.

그러나 1965년 11월27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한국, 미국, 일본, 캐나다 등 5개국 국제친선대회 장영철과 일본의 오구마 선수의 메인이벤트 때, 오구마 선수가 (사전)약속을 어기고 2대1로 역전승을 거두자, 장영철의 제자들인 이석윤, 김학구, 조경구 등이 링 위에 올라 오구마 선수를 유혈이 낭자하게 가격 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당시 장영철 선수 일행이 경찰서에 가서 “프로레슬링은 사전에 경기 방법과 승패를 논의 한다”고 말한 것을 기자가 듣고 “프로레슬링은 쇼다”고 보도하면서 프로레슬링은 급격히 쇄락하기 시작했다.

프로복싱은 70~80년대 최고 인기스포츠 였었다. 

김기수를 시작으로 홍수환, 염동균, 유명우, 장정구 등 한 때 세계챔피언 6명을 한꺼번에 보유 했었고, 평균 3명의 세계챔피언이 있었다.

당시는 세계타이틀 매치는 말할 것도 없고, 장규철, 허버트 강 등 인기 있는 선수들의 동양타이틀 매치도 TV 프라임 타임 때 생중계를 할 정도로 시청률이 보장되는 이벤트였다.

그러나 2004년 WBC 페더급 챔피언 지인진 선수가, 타이틀 매치가 잡히지 않고, 설사 잡히 더라도 개런티를 1000만원도 받지 못하게 되자, 2007년 7월 WBC 페더급 세계 타이틀을 스스로 반납하고 당시 인기가 높았었던 K-1선수로 전향하면서 사실상 프로복싱은 끝이 났다.

지인진은 2008년 2월24일 K-1 아시아맥스 서울 대회에서 일본의 가지와라 유지를 꺾고 첫 승을 올렸었다.

민속씨름은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년 프로축구와 함께 출범하자마자 이만기라는 슈퍼스타를 등에 없고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이만기 외에도 이준희, 이봉걸 등 ‘쓰리 이’씨가 많은 팬들을 확보했었다.

당시 백두급이나 천하장사 결승전 때는 TV 시청률이 50퍼센트를 넘어섰고, 결승전이 연장전으로 가면 중계를 하던 KBS가 9시 뉴스를 뒤로 미루기도 했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팀들이 해체되고, 급기야 2004년 12월 LG 증권 씨름단이 해체되고, 팀의 간판 최홍만 선수가 K-1으로 전향하고, 김영현, 이태현 선수도 그를 따라 K-1 가면서 사실상 공중분해 되었다.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이후 다소 굴곡이 있기는 했었지만, 꾸준히 인기를 모아 왔었는데, 최근에 선수들의 연봉이 너무 올랐고(김응룡 전 감독은 배에 기름이 꼈다고 표현), 원정 호텔 음주, 음주운전, 내기 도박, 승부조작 등의 사고가 잇따라 터지고 도쿄올림픽에서 미국 일본은 물론 도미니카에게도 참패를 당하면서 팬들을 크게 실망시켜,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후반기부터 연장전을 없애 무승부 경기가 속출(8월9일부터 17일 까지 5번이나 나와)하면서 선수들은 승부욕, 시청자들은 시청을 할 의욕이 없어졌고, 롯데, 기아, 한화 등 하위 권팀 들이 모처럼 힘을 내기 시작하고 있는데, 무승부 경기가 나오면서 피해를 보고 있는 것도 프로야구에 흥미를 잃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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