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 다음 주에 갑니다. 비가 와도 가니 시간 꼭 내주세요."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서울에서 기욱이가 막 광주에 도착했어요. 이제 출발해요. 시간 반이면 악양 들어갑니다."
"지금 악양에 비 많이 오네!" 
"괜찮아요. 어차피 비 맞으며 걸을 생각이었어요. 교수님 기다리세요." 

20년이나 묵은 제자들의 전화는 항상 기쁘고 무섭습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교수님 나이 40에 처음 만났는데 자기들도 이제 40이 넘었다고’ 인생무상을 말하니 조용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20여 년 동안 일주일에 하루는 어린 학생들한테 배울 게 많고, 배운 게 많아서 빠지지 않고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오래 묵은 시간이 깊고 진합니다. 이렇게 되어 비 내리는 날에 악양 ‘토지길’을 걸었습니다. 

악양 ‘토지길’은 평사리 마을에서 시작해서 중산간 마을 길을 따라 걸어 상신마을의 ‘조씨 고가’까지 가고, 정서마을의 ‘취간림’을 지나 악양 들판을 에돌아 평사리 마을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시간의 흔적들이 고이 쌓여있는, 그래서 편안하고 푸근함이 가득한 길입니다. 

 

 

예전엔 돌담이 이어진 흙길이었을 겁니다. 새마을 사업 이후에는 시멘트 블록 담이 이어진 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아스팔트를 곱게 깔았습니다. 사라져간 시간이 사라져갈 시간을 안고 골목길에 비 되어 내립니다. 

 

 

매번 입석마을 길을 걸을 때마다 이 담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담장에 덧씌워진 시간의 흔적이 발길을 잡습니다. 멈추어 생각해보면 담장에 페인트를 왜 이렇게 칠했는지 그 마음이 보이질 않고, 붉은색과 파란색 페인트가 어찌 저리 칠해졌는지 아직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항상 담장이 예쁘게 다가옵니다. 그 마음 또한 궁금합니다. 담장을 짝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예쁘게 보이지 않나요?

 

 

 한 그루의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풀들과 비구름 가득한 먹빛 하늘이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옵니다. 어느 길이든 걷다 보면 느닷없이 훅 다가오는 장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그 공간과 내 시간이 딱 들어맞았을 때입니다. 그럴 땐 걸음을 멈추고 그 시간을 즐깁니다. 비 내리는 풍경은 모두에게 시입니다. 

 

 

오늘 걷기의 끝자락인 악양 들판까지 왔습니다. 비구름을 안고 걸었던 골목길을 지나 들판에 들어서니 햇빛이 비치려 합니다. 대략 10여km 정도입니다. 오래 묵은 제자들 덕분에 빗길을 기쁘게 걸었습니다. 비 올 때 토지길을 다닐 생각을 한 적 없는데 막상 길을 걸으니 마주치는 풍경들이 더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역시 생각을 깨트리니 새로움을 깨닫습니다. 수행은 습관적인 관성을 깨트리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걸음은 수행이었습니다. 시간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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