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3년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참석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제작한 휴먼로롯 `아미' 로부터 야구공을 건네받아 주심의 안내에 따라 시구했다. (사진=노무현사료관)

[뉴시안=기영노 편집위원]대통령들의 힘은 막강하다. 그 강한 힘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임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 600여 만 명의 유태인과 그 열 배에 이르는 6000여 만 명 가량의 군인과 민간인을 사망케 했고, 존 F. 케네디(구 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 봉쇄로 3차 세계대전을 막아 수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대(the Apartheid era)를 ‘용서와 화해’로 풀어냈고, 군부독재의 상징 전두환은 86, 88 때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체육인들로부터는 크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다.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은 탁구를 매개로 냉전 관계의 미국과 중국(공)의 관계를 녹여내 인류 평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조지 웨아는 축구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인 최초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됐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은 골프를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촌극을 벌였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인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사망했다.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화 되거나, 침체되곤 했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고, 그 나라의 스포츠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이 연재물은 기자(시간의 물레 간 2013년, 대통령과 스포츠)의 저서를 보강한 것이다>

 

주 5일 근무제 도입…주말 레저 활동 포석 닦아

참여정부 체육 정책의 목표는 국민이라면 차별 없이 누구나 쉽게 체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체육 환경 조성, 학교·생활·엘리트 체육의 체계화 및 선진화, 체육의 산업과 경제적 가치 극대화, 체육의 과학·정보화, 국제체육 협력 강화에 있었다.

이는 참여정부 국민체육진흥 5개년 계획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정부조직의 편성은 매우 미흡했다. 모든 체육조직은 문화관광부 예하로 편입되었고 기존의 체육부 187명이 담당하던 업무를 45명의 체육국 직원이 맡으면서 전문성과 효율성을 잃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함으로써 생활체육과 레저스포츠의 성공적인 발달을 이끌어냈다.

참여정부는 이를 위해 주민 친화형 생활체육 시설을 확충했으며 2002년 한, 일 월드컵에서의 성공에 탄력받아 전국 축구센터 3개소, 축구공원 14개소, 2008년 완공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었다.

또한 2000년 들어 진입한 고령화 시대에 맞춰 시, 도별로 노인 생활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노인체육 지도자 250명을 육성, 배치했다.

또한 ‘스포츠산업을 새로운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는 새로운 체육 정책 목표 아래 스포츠 산업을 21세기 미래형 산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골프 좋아했지만, 재임 시절 거의 필드에 나가지 못해

노무현 대통령은 서민적인 이미지였지만 골프를 무척 좋아했다. 시간이 나면 청와대 앞뜰에 나와서 골프채를 휘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골프는 휴가 때 잠시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재임 당시 분위기가 워낙 불경기였기 때문에 대통령이 골프를 친다는 것에 대해 여론이 좋지 않게 형성된 탓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태권도나 유도 등의 무예를 직접 하지 않았지만, 무예와 무예 원로들에 대해 관심을 보였었다.

취임식 이후 매년 의례처럼 하던 경호실 경호원들의 무예 시범을 대신해 국내 무예 원로들의 시연을 준비하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탄핵 때문에 행사가 취소되기는 했지만, 당시 무예계에서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난 2003년 故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정대철 대표(대통령 좌측),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경내에 있는 소규모 골프장에서 라운딩하고 있다. (사진=노무현사료관)
지난 2003년 故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 정대철 대표(대통령 좌측),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경내에 있는 소규모 골프장에서 라운딩하고 있다. (사진=노무현사료관)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충주 세계 무술 축제 축사 메시지에서 “무술은 몸과 마음을 강하게 하는 인격도야의 무도입니다. 높은 경지의 무술은 예술로도 훌륭한 평가를 받습니다”라고 해 해방 이후 태권도 이외의 무예와 관련된 대통령의 생각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래 봬도 야구학교 나오지 않았습니까”

노 대통령은 기자들이 야구에 관련된 질문을 하면 “제가 이래 봬도 야구 명문 부산상고(현재 개성고) 출신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프로야구 개막전이 아닌 올스타전에서도 시구했다.

2003년 7월, 프로야구 올스타전은 한화 이글스 홈구장인 대전구장에서 치러졌는데, 노 대통령은 시구한 후 동군 감독이었던 이광환 감독과 잠시 환담을 하기도 했다.

“각하 저를 기억하십니까?”

노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제주도 애월읍 해안도로를 지나가는 도중에 당시 제주도에 ‘야구인의 집’을 짓고 칩거하고 있던 이광환 씨를 찾았다.

당시 이광환 씨는 노 전 대통령이 국회 문화관광위원 소속이어서 “야구계의 여러 숙제 중에 국내의 따뜻한 남쪽 지역에 야구장 시설이 절대 부족해 초등학교 야구팀부터 성인 야구팀까지 모두 동계전지훈련을 해외로 나가 매년 외화 낭비도 클 뿐만 아니라 학원 스포츠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씀드렸었던 것‘을 기억하고 물은 것이다.

‘암요, 기억하고말고요, 그때 제가 드린 명함 잘 갖고 계시지요, 아직도 유효합니다“라고 허허 웃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요가 예찬론자였다.

그는 새벽에 약 30분간 요가를 하면서 건강을 챙기고 삶의 여유를 느꼈다.

당시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세상이 두 조각이 나도 매일 요가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청와대에 입성한 뒤 곧바로 요가를 중단해 버렸다.

요가를 중단한 것이 개인적인 건강과 국정을 운영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호화요트 논란…수백만원짜리 중고 ‘딩기요트’로 확인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던 1970년대 말부터 요트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82년 일본 중서부 시가현 오츠시에 있는 비와호에서 영국 왕립요트협회 자격증 보유자이자 스포츠센터 운영자인 이노우에 유시오 씨에게 일주일 동안 요트 강습을 집중적으로 받으면서 요트 맨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후 이노우에 유시오 씨 부부를 청와대로 초청하기도 했고, 이노우에 씨는 2003년 6월, 그와의 인연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의 사인과 사진, 오간 편지 등 각종 자료를 모아서 자신의 스포츠센터 2층에 ‘노무현 대통령 기념관’을 만들기도 했다.

모 신문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호화요트를 탄다고 보도를 하기도 했었지만, 수백만원짜리 중고 ‘딩기(dinghy) 요트’로 확인되면서 오보로 밝혀지기도 했다. 딩기 요트는 4인승 이하의 선실도 없고, 주로 경기용으로 사용되는 소형 요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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