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왼쪽), 김종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과 골프를 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뉴시안=기영노 편집위원]대통령들은 힘이 세다. 막강한 힘을 가진 최고의 권력자임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차 대전을 일으켜 600여만 명의 유대인과 그 열 배에 이르는 6000여만 명 가량의 군인과 민간인을 사망케 했고, 존 F. 케네디(구소련의 후루시초프)는 쿠바 봉쇄로 3차 세계대전을 막아 수억 명의 생명을 구했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 시대(the Apartheid era)를 ‘용서와 화해’로 풀어냈고, 군부독재의 상징 전두환은 86, 88 때 스포츠 장려정책으로 체육인들로부터는 크게 미움을 받지 않고 있다.

리처드 닉슨과 마오쩌둥은 탁구를 매개로 냉전 관계의 미국과 중국(공)의 관계를 녹여내 인류 평화에 막대한 기여를 했고, 조지 웨아는 축구에서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스포츠인 최초로 라이베리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도 인간이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가 회복됐다. 일본의 아베 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은 골프를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촌극을 벌였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병인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사망했다.

스포츠는 그 나라 대통령들의 관심, 그리고 정책 변화에 따라 활성화되거나, 침체되곤 했었다.

지구촌의 현역, 역대 대통령(수상)들은 그동안 어떠한 스포츠 정책을 폈고, 그 나라의 스포츠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아보았다.

<이 연재물은 기자(시간의 물레 간 2013년, 대통령과 스포츠)의 저서를 보강한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시절 빠른 스피드와 리더십을 바탕으로 럭비부 주장을 지냈다.

럭비 선수들은 대체로 스피드가 있는데 노태우전  대통령은 한창 시절 100m를 12초06에 끊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정도 스피드라면 국내뿐 만 아니라 역대 전 세계의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빠른 스피드라고 할 수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전임 대통령인 전두환 대통령과는 육군사관학교 동기동창으로 40년 지기 친구 사이였다.

전 대통령으로부터 육군 참모총장 수석부관, 청와대 경호실 작전 차장보, 부안 사령관 등 주요 보직을 전 대통령 이후에 지냈었고, 결국 대통령직까지 물려받은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83년, 88서울올림픽 서울특별시 유치가 확정되면서 1986년까지 3년간 서울올림픽대회 임시 조직위원장을 맡았었다.

또한 1986아시안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에 임명되어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서울로 유치시키기 위해 각국 정부의 고위층과 아시안 게임 담당자들을 설득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4년 제28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해 KOC 위원장이 되고, 1984년 서울 아시안 게임 임시 조직위원장이 되었다가, 정식으로 조직위원회가 발족하자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장이 되었다.

그 후 1986년까지 서울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으로 아시안 경기대회 준비와 진행을 지원하였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1981년에 유치에 성공했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막식에 참석해서 개막선언을 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전두환 대통령과 다른 정책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전임 대통령과는 반대 정책을 폈었다.

전 대통령이 권위주의 정책으로 일관 한데 비해, 노 대통령은 탈권위주의, 정치 자유화, 민주화 등 문민 정책 등 '보통 사람'을 위한 정책을 펴나갔다.

경제정책도 5공화국 흑자의 기조가 되었던 긴축정책과는 정 반대 경제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전 대통령의 남북 대결 모드를 북방 화해 모드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그의 스포츠 정책만은 전 대통령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제대회 유치와 프로스포츠 활성화 정책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다만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들을 청와대로 부르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태릉선수촌을 찾는 발길도 뜸해졌다.

또한 노 대통령 시절에는 일방적인 엘리트 체육 지향에서 서서히 생활체육 활성화 쪽으로 정책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91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가 창설됐고, 노 대통령 자신도 틈나는 대로 테니스를 즐겼다.

노 전 대통령은 테니스를 거의 마니아 수준으로 즐겼다. 청와대 안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 국가대표급 선수나 코치들을 불러 친선 경기를 치렀고, 국가대표 출신 코치에게 강남 양재동에 실내테니스 코트를 만들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전두환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골프, 홀인원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홀인원 사건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지 얼마 안 돼 홀인원을 기록한 것이다.

2003년 5월 13일 송추CC 153m 거리의 서 코스 7번 홀에서 4번 우드로 홀인원을 한 그는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골프장 관계자들에게 함구령이 내렸다. 바로 한 달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씨가 강남 300CC에서 홀인원 기념 식수를 해 문제가 된 직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골프협회 홀인원 명부에 실린 그의 이름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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