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과 보약 사이

악양은 들도 넓고 산도 깊습니다. 아름다운 산골 마을입니다. 날씨도 좋아 농산물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한 뼘의 땅도 쉬 버리지 않는 농사꾼들은 그만큼 할 일이 많아 고됩니다. ‘농사로 돈 벌어 병원 갖다 준다’는 말이 흔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진기 들고 한량처럼 설렁설렁 걸어 다니는 것이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공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사진기를 들이대면 상대가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해서 사진 찍기 전에 일단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정서적 거리감을 좁히면서 촬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물을 촬영할 때 대화는 필수입니다.  

 

둑길에서 악양들판을 보니 모내기는 거의 끝나 보입니다. 서두른 모는 제법 무성해졌고 느긋했던 모는 아직 여릿합니다. 몬드리안이 그린 면 분할 그림보다 농사꾼이 만든 논의 면 분할이 제겐 훨씬 살갑게 옵니다. 자주 오는 이 자리가 악양 들판의 촬영 포인트입니다.  

 

 

때 늦은 모내기 준비에 바쁜 틈을 비집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모내기가 늦네요. 둑길에서 보니 들판엔 모내기가 다 끝났네요."

"지금도 안 늦었어. 그 뒷논과 요 앞 논 하면 끝이야." 

"근데 모에 약 치시는 거예요?"

"아니야! 모에 보약 주는 거야! 이걸 뿌려줘야 모가 튼튼하게 잘 커"

"보약요?"

"그럼 이건 모한테는 보약이야, 보약!"

맞습니다. 당연히 모한테는 보약이 맞습니다. 병충해도 막아주고, 바이러스병도 막아주는 백신을 맞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여태 모의 입장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툭툭 던지신 말씀이 하나도 허투루지 않았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틀에 빠지지 말고, 이름 지어진 것에 갇히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농약과 보약’을 오가는 사이에 ‘보약통’에 ‘저독성’이라고 적혀있는 걸 봤습니다. 다행입니다. 

 

 

"날 더운데 힘드시죠?"
꼼꼼히 심겨진 감자밭에서 맨발과 맨손으로 감자를 캐시는 아저씨한테 말을 붙였습니다. 
아시는 분인지라 좀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얼굴 잠깐 보여주시더니 이내 등 돌려 감자 캐기에 여념 없습니다. 어떡하든 이야기를 끌고 갈 요량으로 

"이거 하지감자죠?"하니 "아니 이건 일반감자야"
일반감자? "하지감자는 아니고 일반감자는 뭐예요?" 질문과 관계없이 "일반감자가 맛있어" 하시곤 다시 감자 캐기에 돌입하셨습니다. 그 때 마을 어르신이 지나가시다 한 말씀 거드셨습니다. "맛은 붉은 감자가 좋아"  또 웬 붉은 감자?

정해진 답이 없는 대화는 공력이 높으신 스님들이나 하는 대화인줄 알았는데 오늘은 감자밭에서 벌어졌습니다.   

 

 

두 살 전후의 아이들이 발가락 끝을 바짝 세워 방바닥을 밀치고 가는 붕붕카가 밭에 있습니다. 버려진 것 같지는 않고 일부러 놓아둔 듯합니다. 모르긴 해도 걷기 불편하신 할머니가 밭에서 잡초를 뽑거나 비료를 뿌리고 붕붕카에 앉아 쉬시거나 다니시지 않을까합니다. 유모차에 의지해서 길을 걷는 것처럼 말입니다. 붕붕카가 기특합니다. 

 

 

콩밭에 비닐장갑이 오뚝합니다. 하필 가운데 손가락 끼는 데가 그렇습니다. 
새나 고라니가 와서 콩알이나 잎을 따먹고 가곤 하는데 혹 그들을 향해서?

옆에 있는 이들이 이야기를 거들기 시작했습니다. 
"비닐장갑이 반짝이면 새들이 놀래서 안 오겠죠? 왜 식당에 가면 물 채운 비닐장갑 매달아 놓으면 파리들이 안 온다 하잖아요?"
"아니야 일하다가 장갑에 땀이 차서 말리려고 제일 긴 가운데 쪽에 나무를 끼운 거지."
"헛소리들 하지 말고 밭주인 찾아가 물어 봅시다."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마을길 걷기가 즐겁고 시끄러웠습니다. 아점 먹는 식당에서 막걸리 몇 잔 돌더니 더 시끄러워졌습니다. 고마운 한나절입니다.

[ 이창수 사진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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