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약속시간에 맞추어 5분 일찍 가는 사람과 5분 늦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둘러 약속시간에 맞추려 노력해도 어느 순간 긴장을 늦추면 5분을 늦게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주로 5분 늦는 성향입니다. 오늘은 늦은 오후에 아랫동네에 있는 주막집에 약속이 있어 한 시간이나 일찍 나섰습니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걸어갔습니다. 급하지도 않은 약속을 서둘러 가는 멍청함에 인생 묘미도 있습니다. 

일찍 나선 보람이 있습니다. 길가에 있는 다양한 풀들에서 가을빛 잔치가 다양하게 펼쳐졌습니다. 차를 타고 지나쳤으면 보지 못했을 장면입니다. 길을 걷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풍경을 속속들이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늦게 나서서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빨리 나서서 걸어가니 또 다른 풍경을 만난 것입니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펼쳐져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집니다. 그것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의 문제일 뿐입니다.

늦은 오후 빛이 절정입니다. 마지막 힘을 내어 들판을 밝힙니다. 멈추어 서서 오늘 하루도 노고가 많았던 햇빛에 감사드리고 그 빛을 받아 튼실하게 볍씨를 익히는 벼에도 감사드립니다. 주막집 가는 발걸음이 더욱 가볍고 빨라졌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저 당산나무 그늘에서 가을바람을 품지 않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냥 지나친다면 당산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마을 지킴이로 300년도 넘은 당산나무 그늘에서 마을 풍경도 즐기며 섬진강에서 바삐 달려오는 바람을 실컷 품었습니다. 주막집에 닿기도 전에 이미 마음은 새털보다 가벼워졌습니다. 

주막집 주인장의 기타 솜씨와 노랫소리가 일품인지라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몰랐습니다. 멀리서 온 친구들이 신났습니다. ‘긴머리 소녀’를 부르고 ‘못다핀 꽃 한송이’를 부르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불러댔으니 신날 수밖에 없습니다. 옆자리에 있던 젊은 청춘남녀에게 시끄러워서 미안하다고 하니, 자기들도 즐거우니 신경 쓰지 말라는 묘한 충고도 받았습니다. 세대를 뛰어넘은 막걸리는 무적입니다. 
들판을 따뜻이 비추던 햇볕은 가고, 주렁주렁 달린 대봉감을 달빛이 밝힙니다. 뒤끝에 남은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며 달빛 밝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 그립던 말들도 묻어버리기. 못다한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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