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김지윤 편집 자문위원/정치학 박사] 최근 각광받는 휴양지로 꼽히는 베트남 다낭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정상회의가 열렸다. 21개 회원국 정상들이 모인 이 회의의 CEO 서밋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되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상반되는 연설이다. 연설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은 늘 주장해오던 ‘America First’를 외치며 자유무역이 아닌 공정무역을 주장했다. 다자무역협정이 미국의 ‘손발을 묶는다’고 표현하며 세계무역기구(WTO:World Trade Organization)에 대한 불만 토로도 서슴치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의 시진핑 주석 연설이었다. 시 주석은 “세계화는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고 주장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발언을 했다. 다자주의의 유지를 외치며 미국 대신 자유무역의 기수로 나선 것이다.

자유주의 세계 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서구유럽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자유민주주의, 개방적 시장경제, 국제기구와 체제를 통한 상호 협력 등의 세계 질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두 차례에 걸친 처참한 세계대전 후, 세계는 다시는 힘의 마구잡이 사용과 충돌로 인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끔 방안을 고민하게 된다. 그 결과물이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해 무정부 상태인 국제사회에서의 힘의 충돌을 조율하는 국제시스템을 세우는 것이었다. 현재 유럽연합의 기원이 되었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와 같은 지역경제연합, 경제적 협력을 위한 세계무역기구(WTO: World Trade Organization), 북대서양조약기구(NATO: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같은 안보 동맹 블록이 그 예이다.

흔히 국제 관계를 이야기할 때 힘이 지배하는 세계라고들 한다. 그래서 그 힘의 남용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미국과 유럽이 마련해왔고, 전후 태어나 평안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오랜 시간의 평화는 그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효용성에 대한 의구심은 러시아의 조지아 및 크림반도 침공이나 코소보 사태, 그리고 반자유주의 국가로 인식되는 러시아나 중국이 비약적으로 부상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중국의 부상은 여러 서구 국가들을 긴장하게 했다. 개혁개방을 했다지만,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이고 시민의 자유나 민주주의적 가치가 허용되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그러한 중국의 국제무대 데뷔와 성공을 조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중, 더 큰 사건이 작년에 일어났다.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결정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당선. 세계화와 자유무역에 반대하며 오로지 국익을 위한 길을 걷겠다고 천명한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했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험한 말로 미국 중심주의를 외치며 다자협약을 대놓고 비판했던 이단아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야말로 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무너진다는 위기감을 단숨에 불러일으켰다.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도전하는 국가로 여겨왔던 ‘반자유주의 국가’인 중국이 이를 지켜나가는 수호자가 되겠다고 나서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이러한 발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 초, 다보스포럼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ic Forum)에서도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옹호했다. 미국과 유럽이 고안해 놓은 질서가 미국과 영국이 빠지면서 무너질 위기에 있는데, 중국이 미국이 하던 역할을 맡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많은 이들은 중국 역할론에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중국이 미국의 빈자리를 눈에 띄게 차지하며 들어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선언할 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기후변화와 환경 이슈 해결에 중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미국이 개발도상국 경제지원 및 협력 프로젝트 예산을 감축할 때, 중국은 전방위적으로 경제지원 보따리를 들고 외교에 나섰다. 19차 공산당대회 당시 시진핑 주석의 연설문은 중국이 국제사회의 리더로 나서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천명했다. 자신들을 G2(Group of Two)로 분류해서 미국이랑 경쟁하는 것처럼 만들지 말라며 겸손을 떨어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APEC회의 관련 보도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 중 하나가 ‘인도-태평양 전략’이다. 미국-인도-호주-일본을 잇는 협력관계 전략으로, 이미 몇 년 전 아베총리가 주장했던 ‘다이아몬드 안보전략’이 진일보하고 미국이 이름만 바꿔서 사용하게 된 개념이다.

태생이 시진핑 주석의 진주목걸이에 대항하여 고안된 것이다. 일본의 아이디어라지만 미국이 인정하면서 무게감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이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미국이 역내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미국 우선주의, 다자협정 거부, 그리고 TPP 탈퇴까지 감행한 마당에 미국이 태평양 주변국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미중경쟁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진짜는 이제부터이다. 물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의 행보이다. 안보동맹인 미국과 제1 경제교역국인 중국의 사이에서 세련되고 균형감 있는 한국 외교가 절실한 시기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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