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찬 뉴시안 편집국장
김수찬 뉴시안 편집국장

[뉴시안= 김수찬 편집국장]20여년 전 영국에 연수를 갔을 때 마침 귀국하려던 타사 선배 차량을 인수했다. 그 선배는 차를 넘기면서 혹시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상대 운전자에게 먼저 'I'm sorry'라고 하지마라고 충고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잘못을 떠나 그 사고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연수 중 다행히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아, 선배의 말이 사실인 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우리 사회에서 사과가 사라지고 있다. 특히 여야 따질 것 없이 정치권에서 언제부턴가 사과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저 정도면 도의적으로라도 고개숙이는 게 맞는데...”라는 국민 감정을 헤아리던 배려와 염치는 온데간데 없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사건 관련, 정당법·정치자금법 위반,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된 송영길 전 대표는 사과 한마디 없었다. 되레 옥중 창당을 선언하면서 큰 소리다. 가칭 정치검찰해체당을 세워 3.1운동 정신으로 싸워갈 것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정신승리.

민주당도 일언반구 유감 표시가 없다. 최근 윤관석 의원이 징역2년의 실형을 선고받는 등 소속 의원 20명이 연루돼 있고, 전임 대표가 구속됐는데도 말이다. 송 전 대표가 탈당한 사람이라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은 송 전 대표는 지금은 탈당을 해 개인의 몸이라며 재판을 좀 더 지켜봐야 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사과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문재인 정부 당시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사건과 관련, 송철호 전 울산시장과 황운하 민주당 의원 등에게 징역 3년의 유죄 선고가 내려졌는데도 말을 아꼈다. 김기현 전 국민의힘 대표와 여당 측에서 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신 선고 며칠 뒤 SNS활동을 재개하면서 이성윤 전 서울중앙지검장을 응원하는 꽃은 무죄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번 판결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사과'의 ㅅ자도 꺼내지 않는다. ‘이재명의 복심인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대장동 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됐을 때 이 대표는 아직 재판이 끝난 게 아니어서 좀 더 지켜보도록 하겠다며 사과를 유보했다. 이날 판결문에는 이 대표 이름이 120 차례나 등장해 정작 피고인인 김 전 부원장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됐는데도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급기야 법원이 정치인에게 사과(반성)문을 쓰라는 이색판결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최근 한 시민단체가 김남국 의원이 일은 하지 않고 코인에만 몰두해 유권자로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낸 소송에서 법원은 김 의원에게 유감 표명과 재발방지를 약속하라고 판결했다. 김 의원이 SNS에 쓴 1058자 분량의 사과문 중 사과의 뜻을 밝힌 문장은 단 1문장 뿐이었고, 대부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할애했다.

그렇다면 정치권이 왜 이처럼 사과에 인색한 것일까?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박근혜 탄핵 학습효과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소위 국정농단당시 사과는 결국 탄핵으로 이어졌다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 때문인지, 박근혜 탄핵 덕분에 정권을 잡은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조국사태' 등 수많은 국정난맥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하지 않았다.

요즘 여권 일각에서도 김건희 여사 핸드백사태 관련 사과 논란이 뜨겁지만, 대통령실은 아직 사과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여권 일각에선 '정치공작에 엮인 사기사건으로 사과할 일이 아니다'며 사과하는 즉시 야당이 다가오는 4월 총선에 악용하는 동시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으로까지 몰아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호주는 매년 526일을 국가 사과의 날 (National Sorry Day)’로 정하고 있다. 지난 1998년부터 백인 정부가 원주민과 원주민 아이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는 날이라고 한다.

의미는 다르지만 우리나라도 특정일을 정치인 사과의 날로 정하면 어떨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의 입에서 좀처럼 ‘I am sorry' 가 나올 거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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