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약속 시간에 꽉 차게 가는 버릇이라, 만나는 곳에 몇몇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여야 하는데 웬일인지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카톡을 다시 보니 약속 시간보다 30분 일찍 나왔습니다. 시간을 잘못 알았습니다. 엉덩이가 가벼워서 30분의 시간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후다닥 들판으로 갔습니다. 들판은 지루할 틈 없이 날마다 새롭습니다. 하늘 빛 품어 무럭무럭 자라는 벼는 어제 오늘이 다릅니다. 한 자리 잡고 논에 비친 하늘 그림자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들판은 가슴 설레는 그 무엇을 항상 품고 있습니다. 들판을 뚫고 성큼성큼 다가오
길은 걸어야 길“우리가 집 밖을 나서 어디로든 가고자 하는, 그 곳은 이른바 SNS의 핫플입니다.”무리 중 누군가가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 허풍인 듯 허풍 아닌 듯한 말을 하곤 웃어버립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곁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 잘 웃는 이유는, 화려함이 풍족한 삶보다는 평안함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잘 찾습니다. 다른 이들은 먼 길 떠나 이곳에 놀러 오고, 여기 사는 이들은 바로 집 밖이 다 놀곳이니 그런 허풍도 인정할만 합니다. 여름은 수국 꽃으로 시작해서 배롱나무 꽃으
농약과 보약 사이악양은 들도 넓고 산도 깊습니다. 아름다운 산골 마을입니다. 날씨도 좋아 농산물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한 뼘의 땅도 쉬 버리지 않는 농사꾼들은 그만큼 할 일이 많아 고됩니다. ‘농사로 돈 벌어 병원 갖다 준다’는 말이 흔합니다. 그런 와중에 사진기 들고 한량처럼 설렁설렁 걸어 다니는 것이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게다가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공격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무턱대고 사진기를 들이대면 상대가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해서 사진 찍기 전에 일단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정서적 거리감을 좁히면서 촬
연곡사 부도 길을 걷고자 길을 나섰습니다. 하동에서 연곡사가 있는 피아골 가는 길은 섬진강을 끼고 도는 19번 국도인데 봄날엔 벚꽃 흐드러지는 길입니다. ‘벚꽃 잎 흩날리는~ ’. 계절은 한참 지났어도 초록빛 가득한 벚꽃터널의 시원함은 때 이른 여름 더위를 날려 보내는데 충분합니다. 4차선 확장공사로 벚꽃터널 길이 줄어들어 옛정취가 조금 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번국도, 섬진강 길은 언제나 아름다운 길입니다. 연곡사 경내 한구석에서 빛 잔치가 차려졌습니다. 빛이 밝습니다 그래서 벅찹니다. 초록이 아우성입니다. 부처의 자
옥정호에 갔습니다. 진안 ‘데미샘’에서 시작한 섬진강물이 댐에 막혀 생긴 호수입니다. 서울 사는 이, 나주 사는 이 그리고 하동에 사는 이들이 만나기 위해 상대의 거리를 조금씩 덜어낸 곳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만나기 위한 괜찮은 방편입니다. 친구를 만나러 옥정호에 갔으나 친구만 만나지 않았습니다. 만남은 뜻하든, 뜻하지 않든 만나지는 겁니다. 호수에 자리한 돌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보다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 같은 높이로 앉아 그냥 쳐다만 보면 이야기가 나누어집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
[이창수 사진작가] 요즘은 앉은 자리에서 맛집도 가고, 미국도 가고, 우주도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코로나-19가 한 몫을 더해 가상세계에 더 빠져들게 됩니다. 세상살이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해서 등 편한 의자에서 벗어나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세상 마주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걷기입니다. 그냥 어느 곳을 향해 걷고 걸으면 발걸음 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악양들판 길을 걸었습니다. 이제 일 년 농사 시작입니다. 이앙기는 모심기에 바쁘고, 농부는 써레질이 바쁩니다.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