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출전을 앞둔 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경기장 인근 피겨 스케이팅 훈련장에 모인 취재진. (사진=뉴시스)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출전을 앞둔 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탈 실내경기장 인근 피겨 스케이팅 훈련장에 모인 취재진. (사진=뉴시스)

[뉴시안= 기영노 편집위원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의 꽃 여자피겨 프리스케이팅이 17일 벌어진다. 쇼트프로그램에서는 도핑확진 판정을 받은 ROC 카밀라 발리예바 선수가 1위를 차지했고, 이어 ROC 일본 선수들이 상위권을 점유했다.

한국의 유영은 6위, 김해림은 9위를 기록해, 프리스케이팅에서 상위권 진입을 노린다. 한국은 2010 베이징동계올림픽 때 김연아가 사상 처음 금메달, 2014 소치동계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지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때 최다빈이 7위에 올랐었다. 이번 베이징동계올림픽은 유 영 또는 김해림이 최다빈의 기록을 깨트리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하계올림픽의 꽃이 남자육상 100m 라면, 동계올림픽의 꽃은 여자 피겨 스케이팅 싱글이다.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에게는 은반(銀盤)위의 요정(妖精)이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비록 약물을 복용했지만 발리예바는 최근에 8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경이적인 실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여자 피겨의 최고 선수는 올림픽을 2연패한 독일의 카타리나 비트와 세계선수권대회 5번 우승에 빛나는 미국의 미셀 콴이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금메달, 2014 소치동계올림픽 은메달의 김연아도 전설로 남아있다.

그런데 여자 피겨 초창기에 이들의 기록을 뛰어 넘는 기록을 세운 선수가 있었다.

동계스포츠 최강국 노르웨이의 소냐 헤니다. 헤니는 1930년대 세계선수권대회 10연패, 올림픽 3연패라는 믿기 어려운 기록을 세웠다. 헤니는 1912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스키를 탔다가 6살 때부터 스피드 스케이팅을 했고, 7살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9살 때 노르웨이 피겨 스케이팅 챔피언에 올랐고, 노르웨이 챔피언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전문적인 피겨 스케이팅 기술과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런던으로 건너가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원래는 피겨 스케이팅 보다 발레를 좋아했다. 

순서를 택하라면 피겨 스케이팅에 발레를 도입한 게 아니라, 발레에 피겨 스케이팅을 가미 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헤니의 코치는 스웨덴 출신의 그라프스키롬 이다. 김연아의 코치가 세계적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 출신의 남자(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당시 브라이언 오셔)였듯 그라프스키롬 역시 남자였다.

그라프스키롬은 1920년, 1924년 그리고 1928년 올림픽 남자 피겨 스케이팅 싱글 3연패의 불멸의 기록을 세운 선수 출신이다.

 헤니는 12살 때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벌어진 1회 동계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최하위에 그쳤다. 당시는 나이 제한이 없었다(지금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 만 15세가 넘어아 출전할 수 있다)

샤모니 올림픽에서 세계적인 수준과의 차이를 절감한 헤니는 그 후 하루에 7시간씩의 맹훈련을 했다.

헤니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가운데 ‘죽어가는 백조’부문을 배경음악으로 했다. 나이가 어려 깜찍하게 보이려고 짧은 스커트를 입었다. 스커트의 길이가 짧으니까 스핀의 속도가 빠르고 휠씬 높게 점프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유행했던 검정 구두에 검정 스타킹을 버리고 회색, 베이지색, 흰색 등 다양한 색깔의 스타킹과 구두를 착용했다.

헤니가 무릎 위로 바짝 올라온 스커트를 입고, 발레 율동을 섞어 빙판 위를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고, 심판들도 최고 점수를 줬다. 헤니는 1927년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36년까지 세계 선수권대회를  10연패했다. 10년 동안 한 번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금메달을 챙긴 것이다.

헤니는 1928년 스위스의 생 모리츠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932년 미국의 레이크 플레시드 동계올림픽에서 또 다시 금메달을 차지해 2연패에 성공했다.

레이크 플레시드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경기가 열린 빙상장에는 헤니의 피겨스케이팅 연기를 보기위해 관객들이 줄을 섰다. 입장료는 당시로는 거액인 50달러에 암거래 되기도 했다.

당시 헤니는 노르웨이 뿐 만 아니라 유럽의 공주였다. 노르웨이 하콘 국왕은 소냐가 출연할 때 마다 축하 전문을 보냈다.

독일의 프리드릭 황태자는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핀을 선물로 보냈다. 영국, 스웨덴 그리고 벨기에 국왕과 명사들이 앞을 다투어 소냐의 공연을 유치하기위해 혈안이 되었다.

헤니는 1936년 독일 가르미쉬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피겨 역사상 전무후무한 올림픽 3연패에 성공 했다.

가르미쉬 올림픽에서 헤니의 연기에 감탄한 히틀러는 자기의 사진을 크게 만들어 사인한 후 선물을 하기도 했다.

후에 히틀러가 노르웨이를 침공 했을 때  헤니는 프로로 전향을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순회공연을 했고, 당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기도 했다.

헤니의 인기를 헐리우드에서 그대로 두지 않았다. 영화를 찍었는데, 스토리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헤니가 은반 위에서 아이스 쇼를 하는 것을 기록한 영화나 마찬가지인데도 관객 동원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소냐는 1년에 1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렸다. 그 후 헤니는 노르웨이로 돌아와서 결혼했고, 1969년 10월12일 56살의 나이에 백혈병 치료를 위해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숨지고 말았다.

헤니는 자신이 숨지기 1년 전인 1968년 평생 모은 257개의 메달과 상패 그리고 골동품과 예술품을 노르웨이 정부에 기증했다.

이 후 노르웨이는 올림픽 박물관에 소냐 헤니 코너를 마련해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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