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화가 이호영(57) ‘대안공간 NAH설악’ 대표가 수년째 손님의 발길이 끊겨 방치된 속초 설악동의 한 폐모텔을 현대미술 작가들의 창작·전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등 ‘예술정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사진=이태영 기자]
중견 화가 이호영(57) ‘대안공간 NAH설악’ 대표가 수년째 손님의 발길이 끊겨 방치된 속초 설악동의 한 폐모텔을 현대미술 작가들의 창작·전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등 ‘예술정원’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사진=이태영 기자]

[뉴시안= 이태영 기자]문화는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뿌리다.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소신을 갖고 창작 활동에 열정을 불사르는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작품 세계와 삶을 공유해본다. /편집자주

“설악산 자락 속초 설악동의 폐모텔 건물들은 같으면서 다른 시선이 공존하고 있는 폐허 속의 공간이죠. 그곳에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예술로 풀어내 보고자 모인 수십 명의 작가들이 작품을 펼치며, 새로운 ‘예술의 정원’으로 가꾸기 위해 온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수년째 손님의 발길이 끊겨 방치된 속초 설악동의 한 폐모텔이 현대미술 작가들의 창작·전시 공간으로 변화, ‘예술마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예술의 정원'으로 탈바꿈되고 있는  속초 설악동의 폐모텔. [사진=이호영 대표]
'예술의 정원'으로 탈바꿈되고 있는  속초 설악동의 폐모텔. [사진=이호영 대표]

중견 화가 이호영(57) ‘대안공간 NAH설악’ 대표가 그 중심에 서 있다. 국내 현대미술 작가들의 모임인 NAH(Nature, Art, Human) 작가회의 60여 명의 회원들이 최근 설악동의 한 폐모텔에서 ‘대안공간 NAH 설악’ 개관식을 개최했다.

최근 문을 닫은 폐교나 폐건물·폐공장 등 유휴공간을 활용해 문화시설, 체험학습장, 수련원, 캠핑장 등의 시설로 재탄생시켜 지역주민을 위한 공간뿐만 아니라 관광자원 등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이나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창작공간 등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등 호응도 좋다.

폐허의 공간이 미술관으로 탈바꿈된 세계적인 사례도 많다. 2차대전 때 폭격으로 일부 벽체만 남은 독일 쾰른시의 성당을 60여 년 후 콜룸바 미술관으로 변했다. 옛 성당의 흔적을 그대로 살리면서 거기에 조화롭게 새 미술관을 건축했다. 영국의 테이트 모던 갤러리도 도시의 흉물이었던 폐 화력발전소를 20년 만에 리모델링, 세계적인 명소로 바뀐 사례다.

박용일 작 'He Story' 공든 탑   [사진=NAH작가회의]
박용일 작 'He Story' 공든 탑   [사진=NAH작가회의]

세계적인 미술관들도 공간의 재활용에서 탄생했기에, 우리 현대미술가들의 진취적 도전인 설악동의 ‘예술의 정원’이 더 주목받는 이유다.

강원도 강릉이 고향인 이호영 대표는 고향에서 초중고를 나온 후 홍익대학교, 대학원서 미술을 전공,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문학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다. 미술대회에서 상도 받는 등 재능을 보였지만 “예술가의 삶은 고달프다”라는 주위의 염려에 진로 고민도 많이 했다.

중학교 때 피카소 회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게르니카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현재 BH작가회의 회장, 자연, 예술 사람(NAH) 작가회의 대표, 쿤스트라움 유이윤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영원한 화두’ ‘화엄’ ‘꽃들의 시간’ ‘꽃들의 비명’ 등의 타이틀로 덕원 미술관, 미술회관, 인사이트센터, LOFT(미국 LA), LAARTCORE(미국 LA) 바움아트스페이스 등 국내외 전시장에서 46회의 개인전을 펼친 중견 화가다. 2021년 강원트리엔비엔날레에 초대 작가로 초청되는 등 250여 회의 국내 단체, 그룹전에도 참여했다. ‘흐르는 땅-태백’의 타이틀로 폐광 지역 재생을 위한 현대미술 작가전을 비롯해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 주제로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작가가 참가하는 굵직굵직한 국제전도 기획한 ‘글로벌 작가’다. 유나이티드 문화재단 유나이티드 우수작가상, 한국현대미술작가회 우수작가상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김혜성 작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진=NAH작가회의]
김혜성 작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진=NAH작가회의]

‘눈(雪)’과의 인연이 깊어서인지 설악산(雪嶽山)은 눈 내린 겨울을 포함한 사계절 늘 아름답다. 계절의 변화마다 다른 모습으로 방문객들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산을 들어가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지나야 하는 마을이 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모텔과 식당으로 이루어진 설악동 마을. 이곳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과 부모님의 신혼여행지로 사랑받았던 곳이다. 바로 설악동 마을에 현대미술작가들의 예술혼이 펼쳐져 있는 ‘예술의 정원’이 위치한다.

한때 전국 최고의 관광도시의 원동력이었던 설악산과 소공원 주변의 숙박시설은 현재 보호해야 할 환경과 제도 때문에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슬럼화됐다. 수학여행단 유치가 어려워지고 여행객 발길도 뜸해지고 희미한 간판만 남은 폐건물들만 즐비한 설악동에 최근 문화예술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더 이상 손님이 찾지 않아 페인트가 벗겨지고 녹이 슬어있던 폐모텔에 현대예술의 산소호흡기를 달고 ‘대안공간 NAH 설악’으로 새로운 숨을 쉬기 시작한 것. 주민들이 “마을에 문화의 꽃이 피었다”며 젤 먼저 반기고 있다.

“찢어진 벽지가 그대로 액자 안으로 들어가 그림이 되고, 솜이 터져 나온 베개들이 창틀에 꽂혀 한편의 작품으로 피어났죠”

이 대표를 포함한 NAH작가회의 60여 명의 작가들은 오래 방치된 변기도 조명을 받으며 창의적인 설치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 다리가 절뚝거리는 낡은 화장대도 과거를 거쳐온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게 하는 마법의 거울이 되었다. 평면TV가 상용화되기 전에 사용되었던 브라운관을 쌓아 올려서 폐기물에 대한 관점도 바꿔 놓았다.

뒤집은 폐허의 재탄생이 바로 미술가들의 신선한 프로젝트인 ‘설악의 봄’이다. 이곳에 펼쳐진 작품들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테마로 설치 예술의 형식으로 전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폐가에서 오래 방치된 매트리스와 의자가 설치미술의 오브제로 재탄생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죠”

김혜성 작 '거울'   [사진=NAH작가회의]
김혜성 작 '거울'   [사진=NAH작가회의]

NAH작가회의의 취지를 공감한 ‘하늘정원’ 건물주로부터 무상으로 임대했다. 폐허, 죽음의 공간을 살아있는 공간이 재생의 공간을 만들어지고 있다.

관객들은 전시 공간에서 설악산이 가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나듯 작가들이 형성해 놓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나 나누고 공유하며 작가가 초대한 놀이의 공간에서 즐겁게 소통한다.

현재 설악동 ‘하늘공원’은 3층 건물에 36개 객실로 한 층에 200평 규모다. 모든 예술 활동 비용은 지원금 없이 자비로 충당하고 있다.

“문화 대안공간으로 탈바꿈된 하늘공원을 토대로 설악동 숙박단지(관광 B, C 지구)에 15년 동안 방치된 마을 전체를 예술촌으로 만들고 싶어 주민과도 협의하고 있습니다. 고향인 강원도에 예술이 멀리 있지 않음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크죠”

이 대표는 일본 카가와현 카가와군에 위치한 ‘예술의 섬’ 나오시마섬을 참조했다. 인구는 3000명 정도의 작은 섬임에도 예술품들과 미술관들로 가득, ‘예술의 섬’을 표방하고 있다. 이 섬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2004년부터 펼친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라는 예술 프로젝트 때문이다. 섬 전체가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쿠사마 야요이의 땡땡이 호박부터 시작해서 여러 설치작품이 놓여있다. 유명 건축가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도 3개나 몰려 있다. 덕분에 국내외로부터 관광객이 많이 찾아와 유명해지게 됐다.

나오시마섬 못지않게 사계절 관광지 설악산을 배경으로 설악동 길목에 위치한 상도문 돌담마을은 최근 유튜브와 방송 등에 소개된 이후 아이들과 함께 오는 가족 단위 여행자가 많다. 설악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울산바위가 한눈에 보이고 우직한 돌담들이 반겨주는 이곳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여름철 숨은 관광지’로 뽑히기도 했다.

정규리 작 '나의 숲'  [사진=NAH작가회의]
정규리 작 '나의 숲'  [사진=NAH작가회의]

고즈넉한 돌담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골목을 조용히 걸으며 자연과 한껏 어우러지는 예술 작품들을 눈에 담을 수 있으니 ‘제2의 나오시마섬’을 꿈꿀만 하다.

“작가에게는 더 실험적인 게 많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시선이 많아야 더 좋은 작품 나오는 거죠”

그는 최근 미국에서 대규모 국제전시회를 열고 ‘한류 미술’을 공유하는 등 외국 작가들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이곳 설악동에도 미국, 영국, 일본에서 작가들이 와서 직접 작업하는 등 예술혼을 함께 불태우고 있다.

“최근 미국 전시회에서 느낀 사실이지만, 미술 분야에서도 한국의 정서를 더 알려야죠”

NAH작가회의 회원과 외국 작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설악동의 진취적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설악동에서 향후 5년간 현대미술작가 60명의 작품이 다양한 주제에 맞춰 전시될 예정이란다.

탈 장르를 표방하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모습이 그려질 설악동에, 누구나 일상에서 자연스레 예술을 접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정원' 문화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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