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최영일 편집 자문위원/시사평론가] 아인슈타인이 말한 바 있다. 과학의 발전은 계단식으로 비약한다고. 이제 아날로그 시대의 완만한 성장곡선이나 산업화 시대의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워할 때는 지났다. 시대의 주파수가 아주 달라진 것이다. 계획 따위를 세우고 있는 시간 동안 계획을 구성하는 요소는 급격한 변화에 다 뒤바뀐다. 그리고 계획이란 일종의 모델링인데 이는 구성요소가 단순할수록,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가 구분 가능할수록 잘 맞아들어가는 법이다.

이제는 수많은 요소들이 서로 얽혀 들어가 구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수시로 위치와 힘이 바뀌며 돌변한다. 이젠 상수와 구분 가능한 변수 보다 돌발변수가 훨씬 더 많다.

이런 환경은 묘하게 양자물리학에서 그리는 양자의 세계와 닮아있다. 사회학적으로는 이러한 세계를 복잡계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가 단순계 경제학 모델을 버리고 복잡계 정치경제문화사회학의 시뮬레이션을 하며 네이게이션을 돌려야 하는 시대로 접어든지는 어언 20년쯤 된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들어와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파란약, 빨간약의 구분 모르고 매트릭스 세계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4차산업혁명을 공부하지 마라. 도대체 음악을 학습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듣고 누리다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다 헤어지니 귀에 팍팍 꽂히고, 어느날 갑자기 클래식이 좋았다 힙합이 좋았다 락이 좋았다 발라드가 좋은 것이다. 물론 작곡을 하거나 정통음악의 전문가가 되려는 각오가 섰다면 음악도 학습 해야지. 미술도, 수학도, 언어도, 과학기술도, 체육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대의 공룡이라고 부르는 위계서열의 피라미드로 짜여진 대기업, 그 시장과 현장의 데이터가 감각적으로 수용 되어 조직 의사결정단계의 정점으로 가서 검토 되고 분석 되고 판단 되고 계획 되어져 다시 분야 별로 세부적으로 내려오는 업무지시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집단노동이 언제까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보는가? 곧 망할 것이다.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20세기 초에 예견 되었지만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 시대에 벌어질 일이다.

빨리 고정관념을 벗어 던져라. 익숙한 관습에서 벗어나라. 구습에 쩔은 뇌를 세탁이라도 해서 최대한 하얗고 깨끗하게 만들고, ‘감응’에 집중하라. 환경이 움직이고 있는 물리적으로 느껴지는 감각, 파악 가능한 데이터, 지적인 파동의 힘으로 환경감응적 생존지성을 재구축 해나가야 한다. 이젠 지능이 아니라 지성이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고도화, 한마디로 속물주의에 날려 먹은 성찰의 힘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사회성의 시너지는 발휘 되지 않는다.

싸이가 전인권과 함께 부른 노래, 좋은 날이 올거야 가사 속에 정답이 들어 있다.

“결국 질긴 놈이 이긴다 반드시
노력하는 놈은 즐기는 놈 절대 못이겨
즐기는 놈은 미친놈을 절대 못이겨
사실 반칙과 오심도 게임의 일부
미친세상 혼자 멀쩡하면 못버텨”

새로운 야만의 시대가 도래 했다.
질겨야 살아남고 미쳐야 이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성찰의 힘을 가진 지성이 다시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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