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수 사진작가]

 요즘은 앉은 자리에서 맛집도 가고, 미국도 가고, 우주도 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코로나-19가 한 몫을 더해 가상세계에 더 빠져들게 됩니다. 세상살이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해서 등 편한 의자에서 벗어나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세상 마주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걷기입니다. 그냥 어느 곳을 향해 걷고 걸으면 발걸음 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으로 악양들판 길을 걸었습니다. 이제 일 년 농사 시작입니다. 이앙기는 모심기에 바쁘고, 농부는 써레질이 바쁩니다. 계절의 흐름이 한 눈에 읽혀지는 악양들판은 과거나 미래를 넘나드는 타임머신과 같습니다.  

 

산그림자 내려앉은 무논이 무겁습니다. 모닥불을 쳐다보는 ‘불멍’은 현란함에 빠져드는 것이라면 무논을 쳐다보는 ‘물멍’은 고요함에 빠져드는 겁니다. 우주까지는 아니어도 사연 가득한 하늘을 품은 무논이 넓고 깊게 다가옵니다. 

 

무논 가에 모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논을 두드려 깨워 연둣빛 어린모를 심으면 한살이가 시작됩니다. 이제부터 햇빛과 비바람, 그리고 ‘때’를 맞춘 농부의 손길을 통해 변화무쌍한 들판이 펼쳐질 겁니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일로 농사만한 게 없습니다. 

 

모심기를 끝낸 논에서 뒷손이 바쁩니다. 기계식 이앙기가 모를 심고나면 더러 빈구석이 남기 마련입니다. 농사짓는 이들은 한 뼘의 땅도 허투루 두지 않습니다. 허리가 끊어질듯 아파도 이 구석 저 구석 찾아다니며 모를 심는 게 농부의 마음입니다. 

 

연둣빛 어린 모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논바닥에 깊게 뿌리내리고 한여름 볕이나 비바람을 받아낸 가을 추수를 꿈 꿔봅니다. 이제 시작인데 끝이 보이는 악양들판은 역시 타임머신과 같습니다. 쉼 없이 변하는 게 세상살이입니다. 그 변화를 온전히 맞이하면 하늘을 품은 무논의 깊이를 알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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