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1979년 10.26에서 12.12로 이어진 시기는 권력의 공백기였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지만 그는 권력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두들겨 본 돌다리도 다시 두들겨보고 건너는’ 전형적인 외교관이었다. 무난하게 순탄한 길을 걸어온 관료였다. 역사의 대전환기에 그는 ‘권한대행’이긴 했지만 ‘권력대행’은 되지 못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신현확의 증언>에서 “최규하 총리는 외무고시 출신으로 평생 외교 계통에서 일해 온 훌륭한 관료였지만, 난국을 헤쳐 갈 위기관리 능력이나 현실 정치 감각이 부족했다”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힘의 공백기에는 물리력을 가진 집단이 힘을 쓴다. 당시 물리력의 핵심은 군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차지철과 김재규로 대표되는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갈등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정작 막후에서 급부상한 것은 보안사령부였다. 중앙정보부는 부장인 김재규가 대통령을 살해했기에 발이 묶였다.

경호실은 대통령 경호에 실패했고 실장인 차지철이 현장에서 사망했기에 경황이 없었다.

그 공백을 치고 들어간 것이 보안사였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전두환 소장으로 그해 3월부터 근무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5.16 당시 육사 생도들의 지지 행진을 이끌어낸 공로로 박정희 최고회의 비서실에 파견되어 근무했고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내는 등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10.26 당시 우왕좌왕 하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박정희 사망’ 정보를 입수하고 발 빠르게 대처에 나선 곳도 보안사였다.

당시 보안사는 10월26일 밤 8시10분 쯤 “청와대 비서실장이 누군가를 업고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지 30분 정도 지난 시간이었다.

보안사 참모장은 김병수 국군서울지구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드 원(대통령을 지칭)입니까?” “네.” 이처럼 보안사는 박정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정보기관 가운데 처음으로 파악했다.

그로부터 세 시간 뒤 보안사는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아 김재규를 체포,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이것은 다음날인 10월27일 계엄사령부가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발족을 알린 것으로 이어진다.

합수부는 중앙정보부의 모든 기능을 흡수했다. 중앙정보부가 무력화되고 보안사령부가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육사 11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의 핵심이었다.

10월27일 오전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수사기관의 장들이 참석한 합수부 첫 회의에서 전두환은 “간밤에 각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범인은 중앙정보부입니다”라고 규정했다. 중앙정보부의 힘을 완전히 빼는 한마디였다.

11월 6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박정희 시해 사건 전모를 발표했다.

그는 기자들과 일문일답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1월10일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냈고, 12월6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는 사이에 군 내부에서는 서서히 ‘반란’의 싹이 트고 있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10.26 현장에 있었던 것이 빌미가 되었다.

권력 장악을 노리던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 세력은 이에 주목했다. “정총장이 과연 김재규의 저격 사실을 몰랐을까?” “김재규와 함께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이동한 뒤 왜 그를 신속하게 체포하지 않았을까?” 등의 의문이 제기됐다.

전두환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눈치 챈 정승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2월13일자로 전두환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발령 내려 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보안사에 포착됐다.

즉시 전두환의 반격이 나왔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사전재가도 없이 오후 6시50분쯤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해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했다.

암호명 ‘생일잔치’, 12.12쿠데타였다. 만약 12월13일 전두환에 대한 인사발령이 이루어졌다면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정승화의 오판이었다.

전두환은 이에 앞서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등을 연희동 요정으로 초대했다. 발을 묶어놓은 것이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12월12일 저녁 8시,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 최규하 권한대행은 신현확 등과 조각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때 전두환 보안사령관,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박희도 1공수여단장 등이 우르르 들어왔다.

정 총장 체포 건에 대한 결재를 요구했다. 최규하는 “왜 절차를 무시하고 연행부터 하나. 앞뒤가 전도돼도 유분수지” 하고 불쾌감을 토로하며 국방부장관 결재부터 받아오라고 버텼다.

국방부에서 총리 공관으로 오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중간에 보안사에 제지  당해 서류에 사인한 뒤 최규하도 결국 서류에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12월13일 새벽 5시10분쯤이었다. 최규하는 서류에 자신의 사인을 한 뒤 그 밑에 결재 일자와 시간을 적어놓았다.

훗날 최규하는 신현확에게 이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고 <신현확의 증언>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전재가 없이 정총장을 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했고, 12월13일 새벽에 더 큰 혼란과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재가는 하게 됐지만 사후에 재가 했다는 점, 국방장관의 결재 등 정식 결재 절차를 거쳤다는 점, 장시간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결재했다는 점 등을 서류상 명백히 하기 위해 그 같은 방식으로 결재했다.“

정승화 체포에 성공한 전두환 신군부는 노골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냈다. 4월14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됐다. 최규하와 전두환은 겉으로는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이것을 최규하는 자신에 대한 군의 지지라고 보았으나 실권은 이미 신군부가 장악한 상태였다. 최규하의 착각이었다. 이와 관련 이런 일이 있었다.

김정렬 전 국방장관이 신군부로부터 최규하의 사임을 권유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청와대를 찾아갔다.

김정렬이 간곡하게 사임을 권유하자 최규하는 “군이 나를 지지하고 있는데 왜 물러납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신군부에서 다시 사람을 보내 “우리 뜻은 물러나라는 것입니다”라고 확인한 뒤에야 사임했다. 8월16일 최규하는 사임했고, 9월1일 전두환은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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