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숱한 요소들이 작용한다. 관련된 이들도 많다. 그들은 자신의 시각에서 사안을 보고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것처럼 말한다. 막후 주역이 자신이라고 큰소리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 각자가 한 역할은 부분에 불과하다. 부분과 부분이 만나고 일부가 일부와 만나면서 어느 순간 전체가 된다. 그러하기에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 1990년 1월22일 있었던 ‘3당 합당’도 그랬다. 1988년 4월26일 치른 제 13대 국회의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86년은 전두환 5공 정권의 말기였다. 전두환 정권은 은밀하게 내각제 개헌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면 신민당 등 야권은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정권 연장을 바라는 세력과 정권 교체를 바라는 세력의 전선은 갈수록 첨예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 흐름도 날로 거세지고 있었다. 5월22일 장세동 안기부장은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에게 개헌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이하 전두환) 지시 사항을 전달했다. 향후 5년 동안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고 시도의회만 구성하고 순수 내각책임제로 개헌한다는 것이었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79년 10.26에서 12.12로 이어진 시기는 권력의 공백기였다.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지만 그는 권력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두들겨 본 돌다리도 다시 두들겨보고 건너는’ 전형적인 외교관이었다. 무난하게 순탄한 길을 걸어온 관료였다. 역사의 대전환기에 그는 ‘권한대행’이긴 했지만 ‘권력대행’은 되지 못했다.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에서 “최규하 총리는 외무고시 출신으로 평생 외교 계통에서 일해 온 훌륭한 관료였지만, 난국을 헤쳐 갈 위기관리 능력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한국현대 정치사 최대 사건 중 하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의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일 것이다.박정희가 자신이 가장 믿었던, 자신이 임명한 최측근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김재규가 당긴 방아쇠는 역사적으로는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 결정적 순간이었다.하지만 그를 ‘의인’이라고 부르며 추앙하는 것에는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도 현실이다.유신의 핵심에서, 유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일선에서 움직였던 조직이 중앙정보부가 아니었던가. 김재규는 그 조직을 이끄는 수장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74년 8월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이 시작되고 얼마가 지났을까. 오전 10시23분쯤 총소리가 식장을 울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념사 대목을 읽을 때였다.당시 현장은 TV로 전국에 생중계 되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는 이 자리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탄을 머리에 맞았다. 박정희는 육여사가 경호원들에 들려나간 뒤 기념사를 마저 읽고 퇴장했다. 육여사는 서울대병원에서 5시간 넘는 대수술을 했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71년 4월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 선거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와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일대 결전이었다. 박정희는 이번이 대통령으로 출마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호소했다. 김대중은 집권하면 지방색을 일소하고 인재 등용에도 차별을 없애겠다고 주장했다. 투표 결과 박정희는 634만 표를 얻어 539만 표를 얻은 김대중을 94만 6928표 차로 이겼다.이어 같은 해 5월25일에 8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전국 153개 지역구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공화당은 113석, 신민당 89석, 국민당 1석,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66년 9월,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1박2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당시 그는 정치적으로 불운했다. 1960년 케네디에게 대통령 선거전에서 패하고 고향인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떨어진 상태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으나 “닉슨은 끝났다”는 말이 나올 때였다. 브라운 주한 미국대사는 이동원 당시 외무장관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닉슨을 만나주기를 청했다. 이동원의 애기를 들은 박정희는 “그 사람 이미 끝난 사람인데~” 하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61년 5월16일 새벽 2시. 장면 총리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전화를 받았다. 경호실을 통한 보고였다. 당시 장총리는 반도호텔 809호실에 머물고 있었다. 옆방인 808호실이 경호실이었다.장도영은 해병대와 공수부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저지하고 있다며 “아무 염려 마시고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라고 말했다.장면은 “염려 말라는 말만 하지 말고 내게 곧 와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를 하게. 매그루더 미8군 사령관에게도 보고했나?”라고 물었다. 장도영은 “했습니다. 곧 가겠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아이러니하게도 5.16군사정변은 1960년 4.19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4.19 혁명이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60년 5월2일,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은 송요찬 참모총장에게 퇴역을 건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4.19의 민주적 처리로 내외의 박수를 받고 있는 이 시기에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적절하다~.”는 내용이었다. 송요찬은 “군의 단결을 파괴하려는 장성이 있는데 앞으로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며 분노했다.5월5일 부산으로 가 박정희 소장을 만나고 온 김종필 중령은 5월8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파머 발언’은 4.19 이후 등장한 민주당 장면 정권 시절 한미관계를 최고로 긴장시켰던 사건이다. 이 발언은 군부 하극상 사건으로 이어졌고 육군참모총장 경질로 나아갔다. 후임 참모총장이 장도영인데 그가 등장한 뒤 100일도 안 되어 5.16이 일어났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파머 발언’은 5.16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파머 발언’은 1960년 당시 미국 국방성 군원국장이었던 파머 대장의 발언을 말한다. 1960년 9월18일 파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최영희 중장의 초청을 받고 내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해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간 것은 1960년 4월28일이다.이승만은 걸어서 이화장으로 가겠다고 했다. 비서를 비롯한 측근들의 만류도 듣지 않았다. 이승만을 말리기 위해 장면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왔지만 이승만은 만나지 않았다. 허정 외무장관과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경무대에 주인이 없으니 4,5일 더 머물러 달라”고 했으나 이승만은 “오늘 떠나기로 작정했으니 떠나겠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세종로에서 경무대 입구까지 인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⑪ 1960년 4월23일 오전, 재야정치인 허정(이승만 하야 뒤 과도내각을 이끈 인물)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급히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대통령은 경무대 뒤뜰 느티나무 아래 혼자 앉아 있었다.이대통령은 말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했으면 좋겠는가?” 4.18고대생 데모, 4.19 시위로 끓어오른 민심은 이미 이기붕 부통령의 사퇴 정도로는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4월12일 야당 국회의원 세 사람을 대동하고 경남 마산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⑩1950년, 북한군의 공격에 부산까지 밀린 미군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냈지만 전선 상황은 위태롭기만 했다. 낙동강 전선은 풍전등화 상태였다. 그러자 의견이 갈렸다. 미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다른 의견은 적의 허를 찌르는 상륙작전을 감행하자는 것이었다. 미 국방부는 일본으로 병력을 철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으로 철수하는 것은 미군의 사기는 물론 자신에 대한 미국 국민의 신뢰도 또한 떨어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인천상륙작전은 비밀이 아니었다‘낙동강 전선’이 위태롭던 1950년 9월13일, 유엔군 지상사령관 겸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국 육군본부 참모급 이상 장교들을 참모총장실로 소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유엔군 지상사령관 겸 미 제8군 사령관 자격으로 중대 발표를 하겠습니다.이 자리에서 발표하는 사항은 여러분의 부인에게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틀 후인 9월15일 맥아더 사령관 지휘 하에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작전에 참가하는 전 부대는 오늘 오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미국 육군 중장을 역임한 에드워드 L. 로우니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맥아더 장군의 당직장교였다. 북한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맥아더 장군에게 최초로 보고한 인물이다. 미 극동군사령부 첫 대변인이었고, 맥아더 장군을 도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흥남 철수 때는 흥남항을 폭파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그는 1971년 한미 제1군단이 창설될 때 초대 군단장을 지냈다. 한미 제1군단은 한국군 사단과 미군 사단으로 구성된 최초의 연합군단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미 양국은 한미 제1야전군을 창설하고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45년 8월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틀 뒤인 8월8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12시간이 지난 8월8일 자정,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이틀 뒤인 8월10일 일본은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가 일본에게 항복을 권고한)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미국에 통고했다.사실상의 항복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나오면서부터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예상보다 빠르게 남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백범 김구 주석(이하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 1진 15명이 환국한 날은 1945년 11월23일이다.미군 수송기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환국했다. 개인 자격 귀국이어서 아무도 영접 나온 이가 없었다. 김구는 미군정에서 보내준 차로 ‘광산왕’ 최창학의 저택인 서대문 죽첨정(경교장)에 여장을 풀었고, 나머지 요인들은 충무로에 있던 일본인 호텔 본정호텔에 묵었다. 그날 밤 늦게서야 각 신문에서 호외를 발행해 김구가 환국했음을 국민들에게 알렸다.김구는 1949년 6월26일 74세로 포병소위 안두희에 의해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몇 년 전 필자가 서울의 한 고서점에서 발굴한 자료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서울의 유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1956년 4월1일 당시 대통령 공보실이 발간한 이 그것이다. 이 책자는 1954년부터 1955년 12월10일까지 이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들을 수록한 자료집이다. 이 자료집에 따르면 이대통령은 1955년 9월16일 ‘수도 명칭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서울이란 말은 우리나라 말로 수도이지 수도 자체의 땅 이름은 아니
1945년 8월18일 1차 광복군 정진 활동 무산성사되었다면 분단은 없었을 것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1945년 8월15일 일본 황제가 항복선언을 했을 때 임시정부 지도부는 서안에 머물고 있었다. 김구 주석,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몇몇 국무위원, 국내 정진군 총사령관을 맡은 이범석 광복군 2지대장 등이었다. 임정 지도부는 국내 정진을 위한 2지대 훈련 등을 시찰하는 중이었다.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지도부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분초를 다투어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얄타협정에 ‘미-소 양군이 한국
미 군정장관이 ‘서울’ 이름 정했다.1946년 8월15일부터 ‘서울’로 불려. [뉴시안=자문위원·시사저널 편집국장] 인구 1천20만명(2016년 12월31일 기준)에 1년 예산 29조8천11억원(2017년 예산)을 쓰는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다. 그러나 서울시민 가운데서도 이 도시가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서울시’로 불려왔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서울은 조선시대에는 한성,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이라고 불렸다. 오늘날의 서울시장은 조선시대에는 한성판윤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윤이었다. 경당시 경기도 안에는 ‘부’로 불리는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