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었던 여름 더위가 가을장마에 맥없이 물러났습니다. 가을장마는 기상이변은 아니고 그저 가을에 여러 날 비가 이어지면 가을장마라고 합니다. 여름 더위를 걷어 준 가을장마가 고마웠는데 비 내림이 길어지니 비구름을 걷어 줄 햇빛이 다시 기다려집니다. 이래서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함과 모자람’에서 더 나은 선택을 위한 분별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을장마 중에 잠시 빛이 내렸습니다. 비와 빛 사이입니다. 집을 나서 길을 걸었습니다.

숲에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길을 원하면 길이 있고, 빛을 원하면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숲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보고만 있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갔습니다. 숲에 길이 없어 보여도 걸으면 길이 만들어집니다. 길은 걸어야 길입니다. 

 

아침 빛이 가득합니다. 비 내림이 길던 차에 잠시 내린 빛이 반가웠습니다. 걷는 내내 발걸음은 가볍고 숲은 들떴습니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는 귓가에 가까이 있고, 뺨을 스치는 바람결은 상큼했습니다. 자연은 귀로 들어오고 문명은 눈으로 들어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귀가 한껏 열렸습니다. 숲의 숨소리가 들립니다. 

 

한참 서 있었습니다. 빛과 그림자, 밝고 어둠 이외의 그 무엇이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숲의 한 모습이 낯설게 다가와 선택한 풍경입니다. 낯섦은 익숙함을 깨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낯섦은 변화를 선택한다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선택이 매 순간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삶은 그곳에 있습니다.

 

숲의 속내를 찬찬히 들여다보니 여름과 가을의 흔적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더 다가가니 풀잎의 모양새가 속속들이 보입니다. 거기까지 가면 그들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고, 살아있는 풀들과 하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숲의 정령이 깃드는 만큼 마음이 깊어집니다. 

 

다시 비가 오려 합니다. 풀, 나무와 노는 이야기 놀이는 여기까지입니다. 태풍 ‘오마이스’도 오니 집 주변을 오가며 치울 것 치우고, 묶을 것 묶고, 물길도 막히지 않게 부지런 피웠습니다. 산에 사는 것이 한량처럼 보여도 이리저리 부지런 떨어야 합니다. 편안해서 편안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을 불편한 것으로 느끼지 않는 편안함으로 사는 것이 산에 사는 즐거움입니다. 그 맛에 산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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