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소종섭 편집 자문위원/前 시사저널 편집국장]  ‘파머 발언’은 4.19 이후 등장한 민주당 장면 정권 시절 한미관계를 최고로 긴장시켰던 사건이다. 이 발언은 군부 하극상 사건으로 이어졌고 육군참모총장 경질로 나아갔다. 후임 참모총장이 장도영인데 그가 등장한 뒤 100일도 안 되어 5.16이 일어났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파머 발언’은 5.16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파머 발언’은 1960년 당시 미국 국방성 군원국장이었던 파머 대장의 발언을 말한다. 1960년 9월18일 파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최영희 중장의 초청을 받고 내한했다. 이틀 뒤인 9월20일 ‘정군(整軍)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만만치 않은 나비효과를 낳았다. 요지는 이랬다.
“~한국군 현역 장성들은 젊은 장교들의 선동으로 최고위 장성들이 강제 퇴역을 당한 데 대해 커다란 불안과 초조를 느끼고 있다는 나쁜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기류는 바람직스럽지 않다. 사소한 문제로 유능한 장성들에게 압력을 가해 강제로 예편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장면 정부의 감군 정책이 현명한 것인지도 의문이다~”(<동아일보> 1960.9.21)
 
4.19 혁명 정신을 이어 받아 정군(整軍)을 추진해 온 장면 정권은 곤혹스런 상황에 처했다. 당시 장면 정권은 △3.15 부정선거에 직접 관여했거나 △악질적으로 간접 또는 압력을 가한 지휘관 △재직 중에 부당하게 거액의 축재를 한 자 등을 대상자로 정군을 추진 중에 있었다.

파머 발언이 나오자 당시 권중돈 국방장관은 “국가 간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견해차이다”라고 봉합을 시도했다. 반면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은 기자들을 불러 모아 “파머성명은 명백한 주권 침해이다”라는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이 미국의 수혜국가 임에는 틀림없으나 속국은 아니다. 파머 대장의 발언은 주권 국가에 대한 내정간섭이다. 미국이 한국의 내부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려 한다면 한국민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자리를 걸고라도 주권 수호에 힘을 다해 부정한 장성과 장교들을 축출하고 말겠다”라는 요지였다.

국민들의 격려 편지 수천 통이 최총장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미국의 반응은 달랐다. 9월21일 미 국무성은 “파머 대장의 발언은 내정 간섭 의도가 없다”고 발표했다. UN군 사령관인 매그루더 대장은 “파머 발언을 내정 간섭으로서가 아니라 혈맹인 미국의 건설적인 충고로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정군 대상이었던 최영희 연합참모총장의 경질을 요구해 온 정군 주도 세력들은 파머 발언을 최영희 총장의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육사 기수별 대표 16명은 최영희 총장과 만나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 전원은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2차 하극상 사건이었다.(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사임을 불러온 1차 하극상 사건은 1960년 5월9일 육사 8기생 영관급 장교 8명이 군부정화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돌리다가 체포된 사건이다)그러나 한 명을 제외하고 곧 풀려나왔고, 얼마 뒤 최영희 총장은 예편했다.

1차 하극상 사건에 이은 정군 세력의 승리였다. 2차 하극상 사건 막후에는 육사 8기생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중령으로 예편한 뒤 본격적으로 5.16 준비에 나섰다.
 
미국의 반대가 표면화되자 장면 정부는 1960년 11월, 정군 포기를 선언했다. 장성급에 대한 정군은 완료되었으며, 하극상 기풍은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정군 포기’는 최경록 육참총장이 내세웠던 ‘점진적 정군론’의 좌초를 의미했다. 청렴 강직한 성품을 인정받아 장면 정부 첫 육참총장에 임명됐던 최총장에 대해 민주당 정권 내부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이것은 ‘정군 대상자’들이 다시 군의 중심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취임 5개월 만에 최총장이 2군사령관으로 물러나고 1961년 2월, ‘정군대상자’였던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이 된 것이 상징적이었다. 그 배경에 미국이 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4.19 혁명의 정신과 반대되는 흐름이었다. 육참총장이 된 장도영은 취임 즉시 20여 장성들에 대한 과거부정행위 조사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4.19 이후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은 각각 세 번씩 교체됐는데, 장면 정부는 군 물갈이에 실패함으로써 군을 통제할 기회를 상실했다.

이런 가운데 정군을 강하게 주장했던 소장 장교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갔다. 이것은 정군을 명분 삼아 쿠데타를 일으킬 계기로 작용했다. 장도영이 육참총장이 된 지 100일도 안 돼 5.16이 일어났다.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이태희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장도영-이한림 두 사람이 육참총장을 놓고 경쟁했다. 장도영 장인인 백호기 박사의 간청에 현석호 국방장관(백호기와 경성제대 동창 관계였다)이 넘어갔다. 당시 이한림 장군이 육참총장이 되었다면 박정희가 5.16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일으켜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장도영을 제외하고 다른 어느 누가 육참총장이 되었어도 쿠데타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1946년 한국에 와 1960년대까지 한국 정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제임스 하우스만도 비슷한 증언을 내놓은 바 있다. “만일 최경록 장군이 육군참모총장 자리를 그대로 지속할 수 있었다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최장군은 성격이 사사로움이 없고 원리원칙적이었기에 예하 장교들의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았다면 적당히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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