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 챔피언하우스에서 대한체육회 27차 이사회를 마친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치용 선수촌장이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뉴시스)
신치용 선수촌장. (사진=뉴시스)

8월말로 24대 대한체육회 신치용(66) 선수촌장이 임기만료로 물러난다. 선수촌장은 국가대표 선수출신이면 누구나 한번 해보고 싶은 선망의 자리. 9월 1일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25대 선수촌장을 누가 맡을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1966년 6월 30일 서울 성북구 공릉동 9만4000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태릉선수촌. 2011년 진천선수촌이 문을 열기 전까지 40년 넘게 한국체육의 요람으로 올림픽 금메달 1호 양정모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이들 스포츠 스타들의 등장 배경에는 종목별 코치진의 땀과 눈물이 있었고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뒤에는 선수촌장들의 헌신과 노고가 배어 있었다. 지난 55년간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지휘했던 역대 선수촌장의 면면을 되짚어 본다.

故 김성집 선생의 선수촌장 시절 모습. (사진=대한체육회)

선수촌 상징 김성집, 청렴결백한 ‘어른’칭송  

선수촌장하면 ‘김성집’이 떠오른다. 1919년생으로 2016년 97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성집은 ‘태릉선수촌의 전설’로 불렸다. 태릉선수촌 45년 역사에 3대에 걸쳐 18년간 선수촌장을 지냈으니 ‘레전드’로 칭송받을만 하다.

서울 출신으로 휘문고보 재학시절 역도에 입문,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30대의 나이에도 불구, 거푸 동메달을 땄다. 그의 런던올림픽 동메달은 우리나라 올림픽 메달 1호. 14세 때 역도를 시작한 그는 타고난 자질과 성실한 훈련으로 잇달아 비공인 세계기록을 수립, 17세 때인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으나 그의 올림픽 입상을 꺼린 일제가 18세 이하라는 이유로 출전을 막아 참가하지 못했다.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돼 1948년 런던올림픽에 태극마크를 달고 나갔으며 1952년 헬싱키올림픽은 감독 겸 선수로 참가해 개가를 올렸다. 37세 때인 1956년 호주 멜버른올림픽에도 출전, 5위를 기록했다.

40세 때 현역에서 은퇴, 대한역도연맹 전무이사, 부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사무총장, 아시아경기 및 올림픽대회 임원으로 활약했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8년간 체육회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며 어떤 청탁이나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해  '돌' 이라는 닉네임이 붙었다.

김성집, ‘호랑이’별명…재임중 올림픽 ‘금’ 30개

김성집은 1976년부터 1994년까지 태릉선수촌 촌장으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육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부터 종일 훈련장을 돌며 선수들을 독려, '호랑이', '염라대왕', '시아버지' 등의 별명을 얻기도했다. 태릉선수촌 지옥훈련으로 악명 높은 불암산 크로스컨트리는 그의 작품.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김성집이 선수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1984년 LA(6개), 1988년 서울(12개), 1992년 바르셀로나(12개) 등 세 번의 올림픽에서 30개의 금메달을 수확했다. 하지만 휴식시간에는 인자하고 다정다감한 ‘집안 어른’으로 각 종목 코치와 선수들을 감싸 안는 특유의 친화력을 보였다.

초창기에는 유력인사 측근들이 촌장으로 기용됐다. 태릉선수촌 초대 촌장은 서울 동숭동의 대표선수 합숙소를 관리했던 이순재 대한체육회 상무가 ‘관리소장’이란 명칭으로 1년간 재직했으며 1967년 8월 취임한 조세신 촌장부터 선수촌장이란 직함을 사용했다. 3대 촌장은 대표선수들에게 군인정신을 고취시켜야한다는 명분아래 육군대령 출신인 김명환을 기용했고 5대와 7대 촌장은 민관식의 측근이었던 감사원 출신 최영배가 맡았다. 그런가하면 7대 촌장은 이상백의 측근으로 복싱선수 출신인 김명곤이 맡아 뮌헨올림픽을 준비했다. 8대 촌장은 사이클선수 출신인 서영석이 맡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건국 후 첫 금메달을 딴 양정모를 뒷바라지했다. 김성집이 10년 차 선수촌장으로 근무하던 1985년에는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측근이었던 김집이 태릉훈련원장으로 부임, 서울올림픽을 치른 뒤 1988년 12월 체육부장관으로 영전했다.

대한체육회 선정 스포츠영웅 명예의전당에 오른 장창선 전 촌장(왼쪽)과 故 김성집 선생. (사진=대한체육회)

김성집·장창선, 대한민국 스포츠영웅 영예 

 1994년 김성집에 이어 1956년 멜버른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57kg급 4위에 입상한 이상균이 13대 선수촌장에 부임, 그해 히로시마 아시아경기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치렀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1999년 1월에는 최재승 국회의원(아태평화재단 이사)의 측근인 배드민턴 선수 출신 김봉섭이 14대 촌장을 맡아 1년간 재직하다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2000년 1월에는 19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과 1965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의 장창선(레슬링 자유형 52kg급)이 15대 선수촌장을 맡아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를 준비했다. 어려운 집안 환경을 딛고 레슬링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장창선은 2014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역대 선수촌장 가운데 스포츠영웅의 영예를 안은 것은 김성집(2011년) 장창선 2명뿐이다. 그러나 올해 79세인 장창선은 현재 치매 중증으로 요양원에서 불우한 말년을 보내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서울=뉴시스】전신 기자 = 박종길 태릉선수촌장이 12일 오전 서울 노원구 공릉동 태릉선수촌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photo1006@newsis.com
박종길 전 선수촌장. (사진=뉴시스)

20대 빅종길촌장, 런던올림픽 5위 최고 성적 올려

장창선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1980년대 프로농구를 주름잡았던 김인건 감독. 그는 2002년 11월, 16대 촌장으로 취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치렀고  2008년 10월부터 18대 촌장을 다시 맡아 2010년 12월까지 2년 넘게 태릉선수촌을 이끌었다. 김인건에 앞서 1973년 사라예보에서 세계 여자탁구를 평정한 이에리사는 2005년부터 17대 선수촌장을 맡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금13 은10 동9)을 종합 7위에 올려놓았다.

2011년 1월 20대 촌장에 부임한 ‘사격의 달인’박종길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금13 은8 동7)이 종합 5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한국이 해외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린 것이다. 이어 2013년 대한체육회 회장에 김정행 대한유도회장이 당선되면서 1971년 세계유도선수권대회 동메달리스트인 최종삼 전 용인대교수가 21대 촌장에 취임해 2016년 리우올림픽을 준비해 나름 성과를 거뒀다. 금9, 은3, 동8개를 딴 한국은 종합 8위를 기록했다. 2016년 10월 통합체육회 회장으로 당선된 이기흥 회장은 상주 부시장 등 행정직 공무원 출신으로 경북체육회 사무처장이었던 이재근을 23대 촌장으로 기용, 경기인 출신을 선수촌장으로 뽑았던 기존의 틀을 깼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기흥 회장은 2019년 2월 삼성화재의 남자 프로배구 8연패의 신화를 이룩했던 선수 출신 신치용을 24대 선수촌장으로 기용했다. 신치용은 지난 8일 끝난 2020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이 금7 은11, 동14개로 종합 10위 안에 들것이라고 전망했으나 결과는 16위(금6 은4 동10)에 그쳐 한국 엘리트 체육이 19위를 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수준으로 후퇴했다는 질책을 감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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