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 전규열 기자]'삶은 여전히 빛난다(지은이 로랑스 드빌레르, 옮긴이 이주영,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출판연도 2025' 이 책에서 저자는 세상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구원(救援)이고 위로(慰勞)이며 치유(治癒)이다. 아름다움에서 찬란함을 발견하고 찬란함에서 용기를 얻는다고 말한다. 

무엇을 하든 누구와 만나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아름다움과 찬란함이 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치고 보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일생 동안 보지 못하고 일상의 울타리에 갇혀 산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봄을 좋아하게 된 건가? 아직도 가을은 멀리 있어 보이는데...

우리의 삶은 여전히 빛난다.

(P.47) 숭고한 찬란함이 주는 충격

스탕달은 피렌체에 있었다. 뙤약볕 아래 거리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스탕달이 괴로운 것은 폭염 때문이 아니었다. 피렌체라는 도시 그 자체, 그곳의 그림, 벽화, 유적지 등 피렌체에 넘쳐나는 아름다움 때문이 었다. "이성이 마비된 것 같았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이 곁에 있는 것처럼 광기에 휩싸였다." 실제로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일은 "사랑해"라는 고백과 같다. 그것도 은근하고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열정적인 사랑에 가깝다. 단순히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름다움은 광기를 깨어나게 하는 충격이다. 모든 기준이 사라지고 일상이 멈춘 것 같은 혼란함, 평범한 일상의 어느 날, 신이 '획' 지나간 것 같은 혼미함 같다고 할 수 있다. "숭고한 아름다움 앞에서 사색(思索)에 빠졌다."

"숭고한 아름다움." 스탕달은 아름다움에서 느낀 강렬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름다움은 위협처럼 느껴질 정도로 강하다. 이 강한 힘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아름다움은 찬란함이며, 나를 압도하고 사로잡는 이 찬란함은 숭고하다. 마음이 너무 충만해서 불안해질 지경이다. 마치 내가 바라본 대상이 눈에 담는 것을 넘어 내 안의 모든 감각을 만족시켜준 것 같다.

(P.75) 아름다움은 경계가 사라진 세상

아름다움은 나를 더욱 먼 곳으로 데리고 간다. 우리는 이 세상을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 인간이 세상을 하나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향 감각과 시간 감각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듣고 만지고 보고 읽은 것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

아름다움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우리 안에 있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그림, 작품, 바다, 숲처럼 구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 그 자체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아름다움은 단순히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직접 같이 소통하는 삶이다.

어쩌면 아름다움은 무한함의 세상, 경계가 모두 사라진 세상일지도 모른다. 미래를 보는 사람과 더 넓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P.104)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아름다움이 눈에 띄려면 존재의 무게가 필요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에 진심이 되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은 나에게 눈길을 주고 손 을 내민다. "와서 봐! 그리고 존재하라고."

아름다움과 만나면서 얼마나 평화로워졌는지 모른다. 나는 목표와 결과에 더는 집착하지 않는다. 더 이상 성공과 실패에 연연하지 않는다. 세상과 내가 서로 알아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은 문화 속에 존재하든 자연 속에 존재하든 우리가 순간적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경험에 속한다.

아름다움은 실체가 있는 존재다. 우리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관객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상호작용하고 대화한다. 이처럼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고유한 존재임을 느낀다. 아름다움과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메마르고 타락한다.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아름다움이 부르는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아름다움이 지나가는데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다른 것에 몰두하고 싶지 않다.

우리 각자에게는 일종의 코기토(Cogito)가 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근본 철학이다. 이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처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건조하고 차가운 철학이 아니다. 데카르트도 아니라고 부인했다. 오히려 '나는 나다, 나는 존재한다'이다. <성찰>의 라틴어 원문 'Ego sum, ego existo(나는 존재한다, 나는 현존한다)'에서 나온 것으로, 데카르트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어떠한 생각이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실제로 존재한다.

(P.143) 여행은 세상과 함께 걷는 것

여행은 탐구가 아닌 관심의 문제이며, 소비가 아닌 호기심의 문제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감탄이 아니라 미지의 대상, 예상하지 못한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여행을 하는 이유를 찾을 때 '~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중시하는 태도는 의지가 강하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봐야겠다는 강박증에 가깝다. 이런 식으로 여행하다 보면 현재 있는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금세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ㅇㅇ는 다 봤다' 식이다.

인간은 채집가보다는 사냥꾼의 영혼을 갖고 있다. 우리는 트로피를 거머쥐듯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런 마음이다 보니 우리는 실망에 극도로 취약하다. 하지만 자연이든 예술 작품이든 찬란함은 야생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 찬란함은 사용과 소유의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때문에 마음대로 이용할 수도 없지만, 길 들이기는 더욱 힘들다.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독립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모방, 반복, 획일화를 계속 거부하고 피할 수 있다. 남들이 다 가는 여정에서 벗어나 여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걷는다. 우리는 세상의 존재 일부를 공유한다.

(P.175~) 여행 이야기

우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여행과 일을 연결하는 말의 어원에 관해알아본다. 프랑스어 '일(travail)'과 영어 '여행(travel)'은 라틴어 'tripalium'(tri는3, palis는 말뚝을 뜻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말굽 장인이 고집 피우는 동물을 묶어두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삼각대'를 가리켰는데, 나중에 이 단어는 고문 도구를 의미하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일'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고, 이는 고통과 복종의 의미가 뒤섞여 있다. 신빙성은 조금 떨어져도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서 그런지 꽤 와닿는다. 우리는 자신만의 여행을 기획하는 주인이다.

무언가를 하는 것과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세상, 생명체, 사물들에게 감동을 줄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그저 관광객처럼 행동하게 된다. 관광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관광지로 떠난다. 경험에 몰입하지 않고 그저 관광지를 지나쳐 가는 사람이 된다. 세 바퀴쯤 둘러보고 그냥 가버린다. '투어리즘(tourism)'이라는 영어 표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11년이다. 투어리즘의 어원은 프랑스어 'tour(한 바퀴)', 'faire un tour(한 바퀴 돌다)'에서 왔다. 지금의 관광은 나를 잠시 잊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루틴으로 돌아오는 것이 되었다.

'관광객(tourist)'이라는 영어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780년, 프랑스어로 처음 등장한 것은 1803년이다. 광활함을 자랑하는 경이로움을 감상하기 위해 관광객들이 여행을 떠난다. 관광객들은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한다. 원래 '그랜드 투어'라는 말은 영국에서 18세기 말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 당시에 그랜드 투어는 주로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동방으로 가는 여행을 의미했다. 그랜드 투어를 시작한 사람들은 젊은 귀족들, 소수의 부르주아와 학자들, 여러 예술가와 작가들, 일부 영국 여성들이었다. 그랜드 투어를 떠난 유명한 영국 여성으로 메리 워틀리 몬터규(Mary Wortley Montagu)가 있었다. 몬터규는 궁전과 하렘(이슬람 사회에서 부인들이 거처하는 방)을 방문하기 위해 튀르키예를 최초로 여행한 영국 여성으로, 여성 해방을 위해 1739년에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 Woman not Inferior to Man>를 썼다. 이들 탐미주의 여행자들은 상업이나 과학 연구를 위해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문화재와 아름다운 자연을 직접 보기 위해 여행했다. 이들은 이런 여행 목적을 '해부'라는 표현으로 불렀다.

(P.209~) 호기심 이야기

호기심은 반드시 지녀야 하는 자질로,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다. 호기심이 장착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입체감을 가지면서 한층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호기심은 멋진 풍경이나 이국적인 것에만 발동하지 않는다. 호기심은 강렬한 감각이며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이다.

호기심은 말초적인 자극 추구를 뜻하지 않는다. 원래 '호기심(curiosite 영어 curiosity)'이라는 단어는 '걱정하고 보살피다'에서 왔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호기심은 돌보는 마음이다. 돌보는 것은 단순히 관심을 주는 것 이상이다. 나 이외의 것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돌보는 행위다. 돌보는 것은 이타주의적 관용이다. 따라서 '돌보지 않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무심함'을 나타낸다. 호기심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돌보고 세상에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다. 호기심을 기르는 좋은 방법은 자연이든 예술이든 아름다움을 특별한 신호로 이해하는 것이다. 호기심은 응용력이며 지식에 대한 갈증이다.

호기심이 있으면 아름다움과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다. 호기심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 잘 모르는 것에 마음을 연다. 호기심은 편견과 구분을 뛰어넘는 자유다. 호기심을 갖고 보고 느낄 때, 듣고 탐험할 때, 모 험이 시작된다.

"여행 시간을 줄이지 마라. 여행은 오랫동안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노년이 되면 자신만의 섬에 가는 것이 좋다. 여정에서 얻은 것이 풍부하게 쌓인 자신만의 섬 말이다."

'여기'에만 머물지 말자.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여기'는 현실을 가리킨다. 현실은 폭염처럼 짓눌린 일상이다. 페소아는 매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차원적인 삶이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이 현실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하면 삶은 다른 차원이 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깊이를 지닌다. 삶은 비밀 통로, 탈출구가 된다. 현실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아름다움을 경험하면 나의 존재가 무한해지는 기분이 든다. 좀 더 활기찬 삶을 위해 어딘가로 떠난다는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잠시 현실을 벗어나 많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해보자.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지금 이곳에 안주하지 말라고,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앞으로 맞이할 미래, 시간의 깊이와 같은 존재의 저장고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변화와 여행을 위해 존재한다. 일상뿐 아니라 여행에서도 이 전환점을 찾아야 한다. 이 전환의 순간에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아름다움을 경험하면 우리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신한다.

 

 

김도진 법무법인 세종 고문
김도진 법무법인 세종 고문

글 김도진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IBK기업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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