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8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테니스 경기를 갖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정치 분야에서는 공과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테니스와 골프광으로 5공 시절 체육 행정과 인연을 맺었던 그는 초대 체육부장관, 제2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제28대 대한체육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1981년 자신이 유치했던 1988년 서울하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대통령 자격으로 개회선언을 하기도 했다.

체육부 창설 간부 임용과정에서 지역 안배

노태우는 1981년 7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뒤 정무 제 2장관에 임명돼 그해 9월 독일(당시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1988년 하계올림픽의 서울 유치를 진두지휘했다.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그해 11월 올림픽조직위를 구성, 김용식 전 외무부장관을 초대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이어 1982년 3월 20일 올림픽 준비를 지원하기 위한 정부 기구로 체육부를 창설, 초대 장관에 노태우 정무장관을, 차관에 이영호 이화여대교수를 임명했다. 노태우 장관은 이 과정에서 국장급 이상 간부가 거의 영남 출신이고 호남 출신이 한 명도 없는 것을 알고 공보관에 내정된 경남 출신 H 기자(연합통신)를 전북 출신 C 기자(서울신문)로 대체하기도 했다. 전두환에 이어 5공화국의 2인자였던 노태우는 그의 위상이 말해주듯 체육부는 정부 종합청사에 있었으나 장관실은 청와대와 거리가 가까웠던 중앙청에 두고 그곳에서 근무했다. 중앙청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0년대에 일제 흔적 지우기 일환으로 철거됐다. 당시 중앙청 체육부장관실을 출입했던 필자 선배의 말에 따르면 노태우는 집무실에 4성 장군의 계급장이 달린 군복을 항상 걸어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노태우의 체육부 장관 재임 기간은 길지 않았다. 체육부장관 취임 한 달여 만인 4월 29일 내무부장관으로 영전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방영권료 3억달러 협상 성공

노태우는 1983년 7월 김용식에 이어 제2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미국 출장중이었던 김용식위원장은 급거 귀국해야 했다. 서울올림픽조직위는 서울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건물 일부를 빌려 쓰고 있었는데 노태우가 취임하자 5공 실세의 조직위원장실은 정계 거물과 장성 출신 등 외부 손님들로 항상 붐볐다. 당시 올림픽조직위 담당기자였던 필자는 노태우를 공식회견은 물론 위원장실에서 비공식적으로도 취재했는데 그의 태도는 고압적이고 권위적이었다는 인상이 지금도 남아있다. 노태우가 위원장 재직시 성사시킨 업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올림픽 미국지역 TV방영권 협상이었다. 서울올림픽 수익사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사업이었다. 당시 김경호 사업국장, 김범일 방영권 사업과장(훗날 대구시장 역임) 등이 미국 NBC, ABC, CBS 등 3개사와 협상을 벌였다. 결국 NBC로부터 3억 달러(약 3천억 원)의 중계권료를 받아냈다. 노태우는 1987년 대선에 대비, 1985년 여름 민정당 대표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위원장실과 비서실의 사물(私物)을 뺀다는 제보를 받고 추적한 결과 민정당 대표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를 특종기사로 보도하기도 했다. 노태우는 1984년 LA 올림픽이 끝난 뒤 정주영 회장의 뒤를 이어 제28대 대한체육회장으로 임명돼 1년 가까이 재임했다.  

노태우는 1987년 12월 제13대 대선에 민정당 후보로 출마, 36.64%의 득표율로 통일민주당 김영삼(28.03%)과 평화민주당 김대중(27.04%) 등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디. 이어 다음 해 9월 17일 잠실운동장에서 개막한 제24회 서울하계올림픽에서 개회 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 전두환은 들끓는 여론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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