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왼쪽), 김종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과 골프를 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이 김영삼(왼쪽), 김종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과 골프를 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뉴시안=소종섭 편집위원]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 이로써 ‘1노3김 체제’로 표현되는 87년 체제의 정치적 상징 인물들은 모두 현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노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핵심 인물이다. 내란혐의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1995년 대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12월 사면으로 풀려났으며 추징금은 2013년 완납했다. 1987년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해 그해 12월 13대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의 대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됐다.

친구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 군에 있을 때부터 자리를 주고받으며 대통령까지 거머쥔 그는 과도기의 대통령이었다. 국내적으로는 군사정권에서 문민 정권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소련 등 공산권이 붕괴하는 와중에 위치했다. ‘보통사람의 시대’를 표방했고 ‘물태우’라고 불렸던 그는 이러한 과도기에 나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국내적으로는 1988년 총선에서 형성된 야대여소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3당 합당을 단행했다.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자당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영남과 충청 세력이 연합해 호남을 고립화하는 인위적 정계재편을 이루었다. 이런 구도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1989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소련, 중국 등 40여 개국과 수교했다.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수교 국가로는 꽤 많은 국가다. 이런 성과는 ‘북방외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북한과는 1990년 남북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했으며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인프라 공간을 설계한 인물로 주목받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내부순환도로, 수도권매립지, 경부고속도로확장 등이 노 전 대통령 시기에 착공했거나 완공했다. 88올림픽도 이때 열렸다. 1988년 야대여소 정국에서 국정감사 부활, 지방자치법 제정 등 어려운 정국 상황 속에서 야당과 협치를 통해 여러 일들을 만들어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야당의 공세에 밀려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도 지금 돌아보면 평가할만한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은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지난해 아들 노재헌씨가 5.18묘역을 찾아 참회하기도 했으나 생전에 5.18 등과 관련해 육성으로 사죄하는 뜻을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담긴 유언으로 평가된다. 

저작권자 © 뉴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