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 신선경 기자]“공직자란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31년간 공직 일선에서 재난, 정책, 청소년, 규제 등 우리 사회 곳곳을 묵묵히 지켜온 남형기 전 국무조정실 제2차장이 퇴임 2주 만에 언론과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
현장에서 답을 찾고, 정책 속에서 철학을 만들었던 그가 이제 공직의 옷을 벗고 처음으로 꺼내놓은 말들은 놀라우리만큼 따뜻하고도 묵직했다.
“퇴임 소감요? 솔직히 아직 실감은 나지 않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지난 7월 중순. 퇴임 후 처음 고향을 찾은 그는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내려갔다 폭우로 인해 상경을 미뤄야 했다.
아직 퇴임이 크게 체감되진 않지만, 확실한 건 공직자들이 막중한 책임감과 중압감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그때 느꼈다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이전 같으면 재난 대응을 고민했을 텐데, 아무런 의무가 없는 상태로 그 상황을 바라보니 비로소 어깨의 짐이 내려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책임감을 느꼈던 그만큼의 보람과 자부심도 큽니다.”
남형기 전 차장을 만나 공직이란 무엇인지, 우리가 위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남형기 전 차장의 일문일답.
# 처음 공직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 원래 제 꿈은 기자였습니다. 청소년 시절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고, 대학에서도 기자 활동을 했습니다. 군 입대 후에도 그 꿈은 여전했죠. 그런데 군 복무 중에 행정병으로 차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군 행정을 실제로 접하면서 정책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몸소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문서작업이 아니라, 제도와 행정의 메커니즘을 경험하면서 이 분야가 제 적성과 잘 맞는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당시는 군사정부 시절이라 공무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많았지만, 오히려 ‘공직이 어떻게 운영되느냐에 따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겠구나’라는 가능성을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전역 후 곧바로 행정고시를 준비했고, 다행히 비교적 빠르게 합격해 1993년부터 본격적인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국무조정실에서 기억에 남았던 업무를 꼽으신다면?
▲ 저는 공무원 중에 몇 안 되는 아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공직 생활 전반을 돌아보면, 특정 한 가지 업무라기보다도, 끊임없이 이어졌던 ‘정부조직 개편과 부처 이동’이라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새로운 업무 영역을 개척했던 경험 전체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 공보처에서 공직을 시작해 뉴미디어 시대의 서막을 경험했고, 청소년 정책, 복지, 정무, 해양, 규제혁신, 국정평가, 공론화 등 여러 부처를 거치며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습니다.
특히 공보처 시절 케이블TV 도입이라는 미디어 혁명의 현장을 체험하며, 기자의 꿈과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함께 실현할 수 있었던 점은 개인적으로 매우 뜻깊었습니다. 이후 공보처가 해체되며 문화체육부, 복지부, 총리실 등으로 이동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청소년 보호정책부터 주한미군 기지 이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까지 다방면의 국가정책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처가 나를 선택했고, 그때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 경험들이 모두 인상 깊고, 제2차장으로서의 업무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 여러 부처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 가장 어려웠던 업무는 단연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였습니다. 대통령의 탈원전 공약과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공사 사이에서 정책 딜레마가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 공론화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여론조사가 아닌, 숙의 기반의 공론조사를 통해 국민이 직접 학습하고 판단하도록 했고, 찬반 양측이 수긍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냈습니다.
또한 메르스 사태 당시에는 중앙정부, 지방정부, 민간병원 간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총리실 조사단장으로서 직접 병원에 상주하며 이해관계를 조정했고, 방역체계를 정비했습니다.
이처럼 부처 조정의 가장 큰 어려움은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풀어내는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는 공정성과 신뢰, 소통을 바탕으로 국민 눈높이에 맞춘 해결책을 제시하려 노력했습니다.
갈등은 결국 이해당사자간 상호 오해에서 비롯되는 면이 크므로 이를 완화하는 유력한 수단이 바로 소통이라 생각 합니다. 소통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그중 가장 기본이 진솔한 대화죠. 만나서 끊임없이 대화 하다 보면 서로 오해가 풀리고 그러면 자연스레 갈등도 해소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공직생활 과정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경험했고 지금도 승자와 패자를 나누지 않는 상생의 정신으로 소통문화가 활성화 되어야 함을 특히 강조 하고 싶습니다.
# OECD 규제 정책 평가에서 한국이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도하신 정책이나 전략은 무엇인가요?
▲규제를 단순히 타파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사회적 약속”으로 보는 시각 전환이 필요합니다. 저는 규제를 “합리적으로 재설계되어야 할 질서”로 인식하고, 신기술과 산업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정책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이 노력 덕분에 한국은 OECD 규제 정책 평가에서 4개 지표 중 3개에서 1위를 기록했습니다. 제도는 잘 마련돼 있지만, 앞으로도 현장과의 괴리 해소가 중요합니다.
# 메르스, 세월호 등 위기 때마다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당시를 회고해 보신다면?
▲ 국가의 본질적인 기능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국가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반드시 국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적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저는 그 현장을 지켰습니다. 그 중심에는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사고 당시에는 유가족 지원반장을 맡아 현장에 있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절절한 슬픔과 분노를 바로 옆에서 마주했고, 공직자로서 책임감과 무력감이 교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제게 ‘공직자는 단순한 행정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계기였습니다.
이후 메르스가 확산됐을 때는 삼성서울병원에 직접 투입됐습니다. 병원 내부 감염이 빠르게 퍼졌고, 중앙정부, 지방정부, 병원 간 이견이 심각해 상황이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메르스 조사 점검단장’으로 임명돼 병원 지하에 사무실을 차리고 2주간 상주하며 방역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습니다.
당시에는 메르스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가족들도 위험한 곳에 왜 들어가느냐고 말렸지만, 저는 공직자는 어려울 때일수록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접촉자 확인, 역학조사, 격리 시스템을 현장에서 직접 설계하고 운영하며 감염병 대응의 기본 체계를 세워갔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코로나19 상황에서 K-방역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비전문가였지만 조율과 관리 측면에서는 최선을 다했고, 결과적으로는 ‘현장에 있던 공직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 긴 공직 생활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을 언제였습니까?
▲ 무엇보다 재난 대응 업무를 맡았을 때 가장 보람을 느꼈습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폭우·폭설, 산불 등 국가적 위기 상황마다 현장에서 대응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공직자로서 가장 큰 자부심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청소년 정책에도 깊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비행 청소년을 단순히 ‘문제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뒤에 숨겨진 가정·경제·사회적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고 접근하는 것이 국가의 본래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굶주리다가 빵을 훔쳤을 때, 그 아이는 단순한 ‘절도범’이 아니라 보호받지 못한 결과로 비행에 이른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국가가 외면하면 결국 더 큰 사회 문제로 이어지죠. 그래서 저는 ‘국가는 그 아이의 마지막 보호자’라는 마음으로 청소년 정책에 임해왔습니다.
# 후배 공직자나 정책 기획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조언 부탁드립니다.
▲ “90세 노인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것이 20대의 시간”이라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젊음은 그 자체로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 있는 일에 몰입해보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공직이든, 다른 분야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적성과 소질을 찾는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 정책과 행정이 제게 맞는 분야였고, 그 길에 전념하면서 보람 있는 공직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나무를 타는 원숭이와 경쟁하려 들면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무대가 있으니, 그것을 찾고 후회 없이 도전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휴식입니다. 30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에, 잠시 숨을 고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간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습니다.
공직에 있었던 시간 동안 얻은 교훈과 시행착오들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공유할 의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어머니께서 해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나의 아들이 아니라, 나라의 아들이었다.”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며, 앞으로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삶에서 배운 배려, 강인함, 공익적 가치들을 제 삶의 나침반 삼아, 또 다른 방식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습니다.
대담 = 전규열 대표이사 겸 편집인(경영학 박사)
정리‧사진 = 신선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