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안= 이태영 기자]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이던 1450원을 돌파한 뒤 1470원대까지 치솟으며 한국경제 전반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이달 들어 약세 흐름이 가팔라지면서 시장에서는 “1500원 시대가 뉴노멀 될 수 있다”는 비관론까지 부상했다. 고환율이 장기화될 경우 원자재 수입비용 급등, 외화 부채 상환 부담 증가, 수출 제조업의 이익 감소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해 산업계 전반과 국가 경제 펀더멘털(Fundamental)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깊어진다.
# 2주 만에 26원 급등…1500원 가시권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이달 들어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됐다. 6일 1449원이던 환율은 20일 1475원까지 올라섰다. 24일 이날 오후에도 장중 1476원을 기록하며 지난 4월 이후 7개월 반 만의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말 불법 계엄 논란 당시 높은 수준을 넘어선 데 이어, 과거 외환위기(1997년)·글로벌 금융위기(2008년) 시기에서나 관측되던 1500원 진입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원화 낙폭은 주요국 대비 두드러진다. 엔화가 이달 약 1.6% 하락한 반면 원화는 두 배를 웃도는 약세를 보였다. AI 버블 논란 이후 외국인 차익 실현 매물이 쏟아진 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통화정책 완화 가능성 언급이 겹치면서 “한국이 다른 국가보다 먼저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
# 외국인 자금 ‘엑소더스’…주식·채권 동반 이탈
외국인 자금 이탈 흐름은 수치로 확인된다. 외국인은 이달 들어 코스피·코스닥시장에서만 13조2000억 원어치를 순매도했다. 같은 기간 10년 국채선물시장에서도 2만7700여 계약(약 3조2000억 원 상당)을 팔아치웠다.
여기에 서학개미와 자산가 중심의 해외투자 증가까지 겹치며 ‘자본 유출 확대 → 환율 급등’의 악순환이 고착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달러 인덱스가 100 수준인 상황에서도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한 것은 한국 경제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 것”이라며 “자산가의 해외 자본 이전까지 겹치면서 환율 상단 자체가 올라간 상태”라고 분석했다.
# 항공·철강·배터리 줄줄이 ‘직격탄’
환율 급등의 충격은 산업계에 곧바로 반영되고 있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업종은 이미 비상 상황이다.
항공업계는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수백억 원대 환차손이 발생한다.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대형 항공사를 중심으로 외화 부채 상환 부담이 급증하며 내년도 경영계획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분위기다.
철강·배터리 업계도 사정은 같다. 포스코홀딩스, 현대제철,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이른바 배터리 3사는 철광석·리튬 등 핵심 원자재 대부분을 달러로 수입한다. 같은 양을 들여오더라도 환율 상승 탓에 원화 기준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는 기업 수익성을 갉아먹고 제품 가격 인상→물가 압력 확대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 반도체·자동차 “고환율 수혜? 착시일 뿐”
전통적으로 고환율은 수출 제조업에는 호재였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 등 주력 산업조차 수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장비·부품·소재를 해외에서 달러로 구매해야 하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환율 상승이 곧 제조원가 급등으로 이어져 수출 이익 증가분을 상쇄한다. 해외 법인 인건비, 마케팅 비용 역시 대부분 달러로 지출돼 비용 부담이 가중된다.
# 기업들 “내년 사업계획 다시 짠다”…비상경영 돌입
고환율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주요 대기업들은 내년도 경영 계획을 전면 재검토 중이다.
삼성전자는 전사적 비용절감, 환리스크 대응 강화에 나섰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환율 시나리오별 재정비, 투자 계획 조정에 분주하다.
주요 대그룹도 내년 사업계획 기준 환율을 1400원대 초·중반으로 상향하고 대비책 마련에 비상이다.
재계 관계자는 “지금의 문제는 단순히 환율이 높은 것이 아니라 이를 견딜 경제 기초체력이 약해졌다는 데 있다”며 “정부가 금융비용 완화, 세제지원 등 실질적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 정부·한은·복지부·국민연금 ‘4자 협의체’ 전격 가동
환율 급등세가 심상치 않자 정부와 외환당국도 사실상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기획재정부·한국은행·보건복지부·국민연금이 참여하는 이례적 ‘4자 협의체’를 가동해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전략 조정까지 검토 중이다.
24일 첫 비공개 회의에서는 △전략적 환헤지, △한은–국민연금 외환스와프(약 650억 달러) 연장 등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연금 자산을 환율 안정 도구로 활용할 경우 ‘노후자산 훼손’ 논란이, 스와프 확대는 미국의 환율조작국 논란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제약도 적지 않다.
시장에서는 “정부의 대응 시점이 늦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 “구조적 리스크 현실화…단기 처방 넘어 펀더멘털 회복 필요”
전문가들은 지금의 환율 급등이 일시적 충격을 넘어 구조적 취약성에서 비롯됐다는 점에 주목한다.
△외국인 투자 감소, △생산·인구 구조 악화, △자본 유출 가속, △글로벌 통화정책 차별화 등이 겹치며 한국경제의 기초 체력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한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지금은 고환율을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고환율이 오더라도 견딜 수 있는 경제 체력 회복이 핵심”이라며 “수출 경쟁력 강화·산업 투자 촉진·인구 대책 등 중장기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