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더빌트는 인류 역사상 부자순위 10위로 꼽히며 '철도왕'으로 불리고 있다. (사진=위키백과)

[뉴시안=송범선 기자] '철도 전쟁'은 1800년대 후반 당시 철도주들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이슈의 핵심에는 '반더빌트'가 있었다.

1794년 평범한 가정의 농장에서 태어난 코넬리우스 반더빌트는 사업적인 수완을 발휘해 1840년대 미국에서 가장 많은 배를 보유한 부자가 되었다. 반더빌트는 증기선을 여러 척 모아 대규모 상선을 구축했다.

1850년대, 60줄에 들어선 반더빌트는 이미 미국 6대 부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래도 반더빌트는 욕심이 많았다.

철도산업의 미래가 밝다고 판단한 반더빌트는 자신이 아끼던 증기선을 모조리 팔아 철도주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철도주들은 급상승을 거듭했다. 그리고 반더빌트는 ‘철도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반더빌트는 할렘 철도의 대주주가 되면서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많이 부딪혔다. 주주들 간의 힘싸움이 오가며, 격렬한 시세 다툼이 벌어졌다. 

1864년 당시도 현재처럼 공매도 세력이 존재했다. 공매도란 없는 주식을 빌려서 팔았다가 값이 떨어지면 헐값에 다시 사들여 차익을 취득하는 투기방법이다. 즉, 공매도는 주식의 값이 하락해야 이득이다.

반더빌트는 할렘 철도 주식을 매수하며, 500명의 공매도 세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그 결과, 월스트리트는 경악했다. 반더빌트는 1864년 90달러 선에서 거래되던 할렘 주가를 224달러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주가가 2배 이상 오르자 공매도 세력은 처참히 무너졌다. 공매도 세력은 주가가 올라갈수록 손실이기 때문이다.

당시 월가의 사람이었던 윌리엄 폴러는 “500명에 달하는 월스트리트 거물 플레이어들이 반더빌트에게 덜미를 잡힌 꼴”이라고 조롱했다.

반더빌트는 이로써 월스트리트의 거물이 되고 철도왕이 되었다. 반더빌트는 철도주들끼리의 인수합병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며 철도회사를 크게 키워나간다.

1800년대 후반은 철도주가 주식시장에 지배적이었다. (사진=픽사베이)
1800년대 후반은 철도주가 주식시장에 지배적이었다. (사진=픽사베이)

그리고 이리철도 주식을 두고 당대 '월스트리트 무법자'로 불리던 다니엘 드루와 힘 겨루기를 하게 되면서 철도 전쟁이 시작된다. 드루도 반더빌트만큼 이리철도의 주요한 주주로써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드루는 반더빌트와는 다르게 투자자라기보다는 투기꾼에 가까웠다. 순진한 투자자들을 속였다는 명목으로 드루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반더빌트는 동맹 세력을 하나로 모을만 한 큰 힘을 갖고 있었다. 충분한 지분을 보유한 반더빌트는 주주들을 설득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반더빌트는 주주총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며, 숙적이었던 드루를 이사회에서 쫓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증기선 사업을 하던 때부터 반더빌트와 드루는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약싹빠른 드루는 반더빌트와 만나서 자신이 이사회에 남아 있으면 이익이라고 설득했다. 또 드루는 반더빌트의 이익을 성실하게 대변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반더빌트가 드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둘은 화해한다.

그러나 반더빌트와 드루의 동맹은 단 3개월 만에 깨졌다. 드루가 동맹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작전단을 구성해 이리 철도 주가 조작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언론들은 드루를 ‘투기세력의 지휘자’라고 불렀다.

1868년 1월 79달러까지 치솟던 이리 철도 주가는 순식간에 71달러까지 주저앉는다. 당시 언론들은 주저하지 않고 드루가 시세조종의 주범이라고 지목했다.

이에 뉴욕 헤럴드는 “드루가 이리 철도뿐만 아니라 주식시장 전체의 패닉을 조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더빌트는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고, 이리철도를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개시한다. 이사회를 통해 이리 철도를 장악하지 못한다면, 다른 수단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 철도의 인수합병에 착수한 것이다. 드루의 변절에 대한 증오와 월스트리트라는 전장에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반더빌트는 과감하게 응전했다.

드루는 자신의 뇌물을 받은 판사를 동원해 반더빌트의 사람인 버나드 판사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주식전환을 하는 등 싸움은 더 치열해진다.

화가 난 반더빌트는 버나드 판사를 다시 움직여 드루 일당과 이리 철도 이사들을 체포할 수 있는 영장을 발부했다. 또 뉴욕 보안관이 이를 집행하도록 명령한다.

뉴욕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느긋하게 저녁을 먹던 드루 일당은 보안관이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것을 알자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식당을 빠져나온다. 이들은 허드슨 강 나루터로 달려가 선원 2명이 딸린 증기선 한척을 빌려 달아난다.

드루 일당이 줄행랑을 놓는 바람에 이리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다니엘 드루는 반더빌트와 이리 철도를 두고 다퉜으나 결국 패했다. (사진=위키백과)

한편, 뉴욕 중앙역까지 차지하고 있는 반더빌트가 이리 철도까지 완전히 장악해 철도업계를 독점하려 한다는 것에 비판적인 여론이 비등해졌다.

한국의 경우에도 철도 산업은 코레일만이 담당하고 있다. 코레일은 공기업으로 철도운임료를 빠르게 올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간기업이 이 철도산업을 통째로 집어삼킬 경우, 독점적으로 큰 운임료를 거둬들일수 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를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반더빌트는 이제 느슨한 태도를 보이며 더 이상 드루를 체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드루에게 친화적인 회담을 제안한다.

회담의 조건은 “드루가 이리 철도 경영에서 완전히 손떼야 한다는 것”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이에 드루는 이리철도의 재무 담당 임원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결국 철도 전쟁은 반더빌트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언론은 철도 전쟁을 크게 보도했다. 이가 시사하는 바는 두 가지다.

먼저 당시 수 십년간 철도주가 주식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878년 뉴욕 증시에 상장된 기업들을 살펴보면, 전체 54개 가운데 철도회사가 36개, 석탄회사 5개, 전신전화 회사 4개, 광산회사 3개, 증기선회사 1개, 부동산회사 1개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다른 회사들에 비해 철도회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철도회사가 강한 힘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반더빌트가 미국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재산을 공개하는 웹사이트 '셀레브리티 네트 워스(Celebrity Net Worth)'에 따르면, 반더빌트는 인류 역사상 부자순위 10위로 꼽히고 있다. 따라서 당시의 반더빌트는 지금의 빌 게이츠만큼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에 반더빌트를 둘러싼 신경전과 지분 싸움은 당시 언론들의 좋은 소잿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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